-긴급조치 4호-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한강개발주식회사를 개업하자마자 서울거리가 온통 뒤숭숭해졌다.
< 대통령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고 뒤이어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재야는 재야대로 "핍박받는 민중이여 궐기하라!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들이여 궐기하라!" 등 민청학련 명의의 각종 전단을 뿌리며 저항에 나섰다.

그 와중에도 송 마담은 여기저기 땅 보러 다니고 대인관계 넓히느라 분주했고,

형권은 제2, 제3 아지트 구축하랴, 평양과의 연계연락을 취하랴, 눈코 뜰 새가 없었다.

형권은 우선 급한대로 지난 겨울 방학  때 평양에 데리고 갔던 박군 부터 불러내기로 했다. 

당시 상황에서 당장 자기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원으로는 박 군과 김 목사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녁 6시,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박군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형권의 모습을 드러내자 박군은 벌떡 일어나, "형님!" 하고 다가와 품에 안겼다.

평양에서 헤어진 후 4개월 만에 만나는 동지간의 상봉이었다.

형권은 그를 뜨겁게 포옹해 주었다.

"종수, 나 때문에 마음 고생 많았지?"

"아닙니다. 저는 형님 덕분에 눈도 뜨게 되고 이렇게 어엿한 혁명가로 자랐습니다."

종수의 늠름한 자태는 몇달 전 아르바이트할 때와는 달리 사뭇 성숙한 모습이었다.

"그래, 그 동안 별 일 없었나?"

"녜, 아무 일 없었습니다."

"평양에서 언제 돌아왔지?"

"1월 말 경에 내려왔습니다."

"1월 말이라.... 그럼 대체로 필요한 교육은 다 받았겠구만!"

"네, 평양에  더 있으면서 많은 걸 배우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습니다."

"내려온 후 중앙과의 연계는 몇번이나 가졌었나?'

"두 번 보고하고 두 번 지시 받았습니다."

"응! 그랬었구만! 그런데 개업식장에는 어떻게 알고 왔었나?"

"친구들하고 레스토랑에 갔다가 거기서 들었습니다."

"그래, 그 동안 동지 규합은 얼마나 했나?"

"모두 16명을 포섭했는데 서울 법대에 여섯 명, 고려대학에 여덟 명, 그리고 성대와 한양대에 각각 한 명씩 있습니다."

"일송회라는 것이 서울대 조직이던가?"

"네, 그리고 고려대 조직은 송죽회구요. 벌써 알고 계셨군요?"

"그 동안 많은 일을 했구만! 그래 활동비는 떨어지지 않았나?"

"네, 평양에서 내려 올 때 공작금으로 3백만원 받아가지고 왔습니다.

"3백만원 받았으면 꽤 중량급 대우를 받았구만!  돈 쓸 때 조심하라구, 흥청거리지 말고."

"염려 마십시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공작금이 실적에 비례된다는 거 명심해 두라구.  알겠나?'

"액수에 구애받지 않고 신명을 바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 자, 그럼 우리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나가서 대포나 한잔 하자."

형권은 공작금이 실적에 비례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그리고 또 작년에 접촉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종수를 데리고 고급 요정으로 갔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은 그 간에 쌓였던 회포를 나누었다.

얼굴이 벌겋게 취기가 오르자 종수는 평양에서 감동을 받았던 예술 영화 <4.19 인민항쟁>의 주제가를 입속으로 불렀다.

 

--- 사나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

--- 나 하나의 안락을 찾다가 말랴

--- 누구냐 이 나라를 지켜 나설 자

 

--- 일어나라 대장부야 목숨을 걸고

--- 감옥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

---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형권은 종수의 흥분된 노래를 들으며 평양에 한 번 갔다오는 것이 저만큼 큰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대충 중요한 이야기가 끝난 다음, 형권은 아가씨들을 불렀다.

둘은 그날 저녁 마음껏 술을 마시며 피로를 풀고 내일의 큰일을 위하여 건배를 하고는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종수는 예상했던 대로 학생운동 지도자로서 조금도 손색 없는 재목감이었다.

 

 이튿날 아침, 형권은 다시 김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김 목사는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 아이구 정 선생님 아니십니까?  이거 얼마 만입니까?  그러지 않아도..."

" 네,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안부도 전하지 못해 미안하게 됐습니다."

김목사의 목소리는 첫마디부터 교회에서 만났던 과거의 '정 선생'을 대하던 태도가 아니었다.

형권은 김목사에게 전날 밤에 들렀던 요정으로 나오도록 하고 정각 6시, 약속시간에 맞춰 요정으로 갔다.

요정의 마담과 아가씨들은 형권이 들어서자 단골손님처럼 반겼다.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한 손님이 있는데..."

마담은 벌써 알아차리고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다며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이 열리자 김 목사는 반색을 하며 일어나 두 손을 모아 형권의 손을 잡았다.

상대가 어떤 위치라는 것을 알고 나이는 아래지만 위로 쳐다보는 태도였다.

두 사람은 서로 굳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 저녁상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님,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지요?"

"정 선생님한테 덜미를 잡혀 평양까지 가게 됐던 것이 자존심은 좀 상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정 선생님의 그 노숙한 공작 수법에 감탄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 동안 목사님의 공적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당 중앙은 목사님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

" 당에서 저에게 베풀어준 은총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살아 생전에 수상님을 한번 더 뵙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두 사람이 요담을 나누는 사이 저녁상이 들어왔다.

형권이 먼저 술병을 땄다.

" 자, 목사님 한 잔 받으시죠!"

"아니, 제가 먼저..."

김 목사가 술병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주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결국 형권이 먼저 한 잔 따르고 김 목사가 술병을 기울이는데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자, 건배하시죠. 목사님의 건강을 위하여!"

"우리 사업의 성공을 위하여!"

김목사는 주량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아가씨를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었다.

 

 

-구속자 가족들을 찾아서-

<대통령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고 민청학련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닥치자

거기에 맞불을 지르듯  학생, 지식인, 종교인들의 시위도 꺼질 줄 몰랐다.

대중투쟁에 대한 전술적 지도원칙으로 볼 때

'승산 없는 무모한 투쟁을 피하되 동기 여하를 불문하고 일단 시작된 대중 투쟁에 대해서는 외면하지 말고 적극 불을 붙여야 한다 '

는 당의 전술적 방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형권은 당시의 투쟁을 외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현지당 지도부가 구성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평양으로부터 넘겨받은 조직들이 어떤 조직인지도 파악도 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 중 4개의 조직을 검열해본 결과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대부분의 조직들이 공작금만 축을 내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부실한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조직에 대한 검열 결과를 종합해본 순간!  형권은 지하당 조직 사업에서 정상적인 궤도를 밟지 않고 금전으로 매수하거나

단순한 연고관계로 얽힌 조직은 공고한 조직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되었고,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허탈감으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렇게 현지조직에 대한 검열 결과를 가지고 고심하고 있던 어느날, 비상전보가 날아왔다.
"모친 병 위급 급래, 박종수"
비상접선을 요망한다는 것으로 보아 위급한 상황은 아닌 것같아 형권은 지체없이 박군을 불렀다.
"선생님! 큰일났습니다."
"왜! 무슨 사고라도 났나?"
"어제 우리 일송회 회원 가운데 이동춘(가명)하고, 최윤호(가명) 군이 경찰에 연행됐습니다."
"무슨 혐의로?"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것 같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이라, 혹시 일송회에 대해서 무슨 냄새를 맡은 거 아닐까?"

"일송회는 조직된지도 얼마 안되고 별로 활동한 것이 없기 때문에 단서를 잡힐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경찰에서 연행했지?"

"최 군하고 이 군은 일송회에 가입하기 전부터 학생운동에 관여했던 친구들입니다." 

"좌우간 조심하라구.  이번에 선포된 긴급조치 4호는 지난 1월에 선포한 1호와는 달리 형량을 최고 사형까지 엄명한 것이니까 그만큼 위압적인 거야.

그러니까 다른 회원에게도 주의를 환기시키고 조직관리를 철저히 하라구."

들어보니 연행된 학생들의 사상적으로 믿을 만하기 때문에 그 피해범위가 일송회가지 확대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형권은 박 군에게 제 2, 제 3의 비상대책을 강구하도록 한 다음,

이번 민청학련 사건으로 검거된 대상들의 명단과 그들의 인적 사항에 대해 조사, 보고하라는 임무를 부여하고

김 목사에게도 같은 내용의 지시를 하달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골몰하다 며칠 만에 집에 들어가보니 송 마담이 반색을 하면서도 걱정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보!  어떻게 된 거에요?"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요 며칠 동안 소식도 없고, 연락도 안되서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별 걱정 다 하고 있네.  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

"당신도 국민운동본분지, 민주화 운동인지 한다면서 서명운동도 하고 그랬잖아요?"

"그런거 한다고 내가 나서서 설치는 것 봤어? 그런 걱정 말고 당신은 사업이나 잘 하라구....."

"당신 없으면 전 못살아요. 병 걸려 죽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제발 민주화 운동인지 뭔지 그런 데 나서지 마세요."

"알았어. 이제 그만 하라구! 그건 그렇고 당신 하는 일은 잘돼 가는 거야?"

"네, 아주 잘되고 있어요. 신사동에 짓고 있는 집은 6월에 완공 되고 또 그 옆에다 땅  2천 평 사 놓았어요."

"땅을 사 놓다니! 나하고 의논도 안하고?"

"한 동안 들어오시지도 않고 연락도 안됐잖아요!  복덕방에선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되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자꾸 그래서 사 버렸어요."

"평당 얼마씩 샀는데?"

"평당 천 원씩 2천평이니까 모두 2백만원 준 거예요. 그런데 복덕방에선 그 땅을 평당 5백원씩 더 붙여서 팔아 줄 테니 내놓으라고 야단이에요.

그리구 동생한테 맡겨 놓은 레스토랑도 손님이 여전하구 잘 되고 있어요."

"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그런데 그러다 보면 당신 돈 방석에 올라앉겠는데?"

"이게 다 당신 덕분이지 뭐예요. 당신하고 만나기 전에는 내가 가지고 있던 거라곤 사글세방 보증금 밖에 더 있었어요?"

"그래도 당신이 부지런하고 성실하니까 복이 다 따라오는 거라구...."

"참! 그리구 며칠 전에 사주를 보니가 우리 궁합도 좋고, 10년 안에 대성한다지 않겠어요!"

"그래!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그런데 여보 돈을 그만큼 벌었으면 좋은 일에 쓸 줄도 알아야지."

"왜요! 어디 쓰실 데 있으세요?"

"어디 쓸 데가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라 당신 안면도 넓힐 겸 사회 봉사도 하고 그래야지...."

"어디다 얼마쯤 어떻게 해야되죠?"

"봉사할 곳은 많지. 고아원, 양로원도 있고 장학생도 키우고..."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그런 거 다 할 수는 없잖아요?"
"물론 다 할 수는 없지. 그런데 우선 먼저 우리가 돌봐줘야 할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누군데요?"

"구속자 가족들을 방문하고 위로해 주는 거야."

"뭐라구요! 그런 거 잘못하다간 경찰서에 찍히잖아요?"

"그런다고 다 찍히나! 구속자도 다 사람 나름이지."

"우리가 돌봐 줘야한다는 사람이 누군데요?'

"저 , 서울 법대 다니는 박군 있지!"

"네, 알아요. 박군이 구속됐어요?"

"박군이 구속된 게 아니라 그 친구들이 두어 명 구속 됐는데 모두 형편이 어렵다거든!

그런데 박군도 형편이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 줬으면 해서 그래."

"당신 의향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여보! 고마워."

형권은 송 마담을 힘껏 끌어 안았다. 그러면서 귀엣말로  속삭였다.

"내가 가도 좋겠지만 당신이 가는 것이 더 좋을 거야. 가서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위로만 해주고 와. 알겠지?"
이렇게 형권은  송마담으로 하여금 박군을 앞세우고 최군과 이군의 가족들을 방문하고 위로금으로 각각 5만원씩 전하도록 했다.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현상수배된, <이철>, <유인태>에게 걸린 현상금 20만원에 비하면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모한 투자가 아니었다. 

형권은 그 후에도  먼 앞날을 내다보고 김 목사와 박 군을 통해서 그 조직원들을 동원하여 구속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자기들에게 물심 먕면으로 후원해 주는 그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훗날 그들이 알게 될 때 ,

몇십 배의 진가를 발휘하게 되리라는 것을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호랑이 굴에서 만난 동업자-

 

민청학련 사건 전모가 점차 밝혀지면서 수사대상에 오른 인원수가 무려 천여명이나 되는가 하면 그 중 죄상이 무거워 군법회의에 송치될 대상만 해도 250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은 학생들뿐만아니라 문인, 언론인, 종교인, 변호사 등 사회 각계 인사들이 모두 관련된 사상 최대의 대형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형권은 구속자 가족들에 대한 위로 방문을 계속하였고 날이 감에 따라 그 효과가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속자 가족들에 대한 위로 방문이 계속되던 어느 날, 평양으로부터 5월 5일 낮 12시, 그랜드 호텔 커피숍에서 유인포스트로 접선하라는 전문이 날아왔다.

유인포스트로 접선하라는 것으로 보아 별로 위험부담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접선 상대는 누굴까?"

그 상대가 현지당 지도부 성원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할 동업자임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형권은 우선 손님을 맞기 위해 송 마담에게 5월 5일자로 타워호텔에 예약해 놓도록 하고 비상연락선으로 박군을 호출했다.

"선생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응, 내 오늘 종수하고 대포 한잔 할까해서 불렀는데 다른 약속은 없나?"

"네, 없습니다."

"내일은 어떤가?"

"내일이 어린이날 아닙니까?"

"그렇지! 어린이날이지."

"내일도 별 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그럼 잘 되었네. 지금 이시간 부터 내일까지 나하고 함께 지내지. 괜찮겠나?"

"네, 좋습니다."

"먼저 종수한테 중요한 과업을 하나 맡기겠네."

"....."

"내일 낮 12시 정각에 바로 이 장소에서 손님을 한 사람 만나 줘야겠어"

".....?"

" 아주 귀한 손님이야. 접선 신호로 <월간조선> 5월호를 테이블 위에 놓고 있으면 오른손에 흰색 지갑을 든 젊은 여자가 접근하면서 암호를 물을 것이네."

형권을 종수에게 접선암호를 알려주었다.

"'혹시 송교수님 찾아오신 분 아니세요?'  '네, 그런데 아가씬 누구시죠?'  '교수님이 저보고 모셔 오라고 해서 제가 왔습니다. '

이렇게 암호를 교환하고 나서 그 아가씨의 안내를 받아 또 한 손님을 만나 가지고 타워호텔로 모셔오면 돼.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됐어. 그럼 우리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 종수 생선회 좋아하나?"

"네,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습니다."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했는데 오늘 피로도 풀 겸 실컷 마셔 보자구."

"제가 선생님하고 이렇게 자리를 같이 하다니...! 영광스럽습니다."

"의형제 맺은 것 벌써 잊었나? 어려워하지 말고 우리 둘이 있을 땐 그냥 형님이라고 그래."

두 사람은 호텔에서 나와 북창동 골목에 있는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저녁상이 차려지고 아가씨들이 들어와 술잔을 각각 채웠다.

"자, 오래간만에 건배 한 번 하지."

"위하여!"

"위하여!"

 

 다음날 저녁 5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감격의 시각이 다가왔다.

 형권이 박군의 연락을 받고 호텔에 들어서자 손님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와락 달려들어 부둥켜 안았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동지였던가?' 오로지 당과 혁명을 위하여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생사고락을 같이할 동지였기에 두 사람은 오래도록 떨어질 줄 몰랐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새로 만난 '동업자'는 통혁당 수습공작에서 많은 공로를 세워 당 중앙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김남혁(가명)이라는 사나이였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는 지난 1월달에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오신다는  소식 듣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선발대로 나오셨군요. 하여튼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겸손의 말씀입니다."

 

'적지'에서 이렇게 '동업자'를 만나게 되자 형권은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말이 있듯이 우선 서로 의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양쪽에서 따로 거느렸던 조직들을 통합 관리하게 되다 보니 매사에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도 배로 늘어나 지도부가 의도하는 모든 공작을 신속 정확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형권은 자기자신보다 연령으로 보나 투쟁경력과 조직적 수완, 그리고 성품으로 보나 거의 완벽할 정도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선배 공작원과 손을 잡고 호흡을 맞추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이렇게 두 동업자가 만나 서로 받들고 의지하며 앞날의 공작을 설계해 나가던 어느 날, 김 목사로부터 비상신호가 날아왔다. 긴급접선을 요하는 신호였다.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수고랄 게 있습니까? 정 선생님이 옆에 계시니까 더욱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웬일이십니까?"
"다른게 아니고, 지난 달부터 우리가 구속자 가족들을 위해서 위로방문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네, 그랬죠!"
"그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네, 보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KNCC에 인권위원회가 발족되더니 교회여성단체연합회를 비롯해서 기장, 예장, 카톨릭 등 각 교단에서 일제히 구속자들의 인권문제를 들고나오기 시작했는데.... 그러고 보니 결국 씨앗은 우리가 뿌려 놓고 열매는 그 사람들한테 빼앗기는 꼴이 되었으니 이거 분통이 터질 노릇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급전을 띄우셨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각 교단에서 벌이고 있는 인권운동과 우리가 하고 있는 위로방문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현 시점에서 인권운동과 같은 합법적인 운동은 오히려 우리가 하는 것보다도 각 인권운동단체에서 하도록 맡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

".....?"

"그러니까 목사님께서는 각 교회단체나 인권단체에 우리 조직원들을 더 많이 침투시키고 각 단체의 핵심인물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우리편으로 끌어 당겨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계 내에도 워낙 교파가 많은 데다가 또 파벌 싸움이 어찌 심한지 기장 계통 외에 다른 교단에는 파고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요!"

"목사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이제 순수한 기독교 목사가 아니라 남조선혁명의 중책을 맡으신 혁명 간부십니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선 우리 지하당 지도부가 힘껏 밀어드릴 테니까 조금도 걱정 마시고 용기를 내십시오."

 

작년 10월 평양에 갔을 때 체류기간이 짧았던 관계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결과, 몰라서 못하는 것을 어찌 하랴!

이는 바단 김 목사뿐만 아니라 평양에 가서 단기 교육을 받고 나온 현지 간부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약점이었다.

그렇다고 김 목사 하나를  붙들고 앉아 매일 몇 시간씩 교육 할 수도 없고...!

형권은 장차 현지당 지도부가 구성되고 조직이 수습되는 대로 김 목사의 위치와 그의 공작비중을 고려하여 유능한 지도핵심 간부를 붙여주기로 결심했다.

 

 

 

-북쪽에서 온 선물-

 

5월 5일, 선발대로 나온 '동업자'와 접선한지 보름 지나서 또 한 명의 '동업자'(가명 강호신)가 두툼한 선물꾸러미를 가지고 현지당 지도부 성원으로 합류되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강호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정형권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김남혁이라고 합니다."

드디어 서울시당 지도부를 구성할 3명의 지도핵심이 한자리에 모여 앉게 되었다.

비밀사업 원칙상, 세 사람은 서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지만 모두가 당 중앙으로부터 신임받고 있는 검열된 노숙한 혁명간부라는 공통점으로 하여 세 사람은 더 더욱 막역한 사이 같았다.

상급당에서 임명한 대로 형권이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총체적인 책임을 맡았고, 김남혁은 특수공작 담당(정당, 사회단체, 공공기관, 군부대) 부위원장, 강호신은 일반공작 담당 부위원장으로 각각 업무를 분담했다.

현지당 지도부의 명칭은 '한강개발 주식회사'로 위장하고 위원장은 대표이사 또는 회장으로, 김부위원장은 전무이사, 강부위원장은 상무이사로 각각 호칭하기로 했다.

두 이사는 그 간의 대남공작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공을 세우고 경륜을 쌓은 노장이었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형권을 깍듯이 선배님으로 모셨다.

 

서로 인사를 주고 받은 다음 , 평양에서 온 선물꾸러미를 헤쳐보니 미화 10만달러와 난수표 두 통이 나왔다.

난수표 묶음이 나오자 강 이사가 입을 열었다.

"이것은 당 중앙에서 보내는 지시문이고, 적색으로 표시된 한 통은 이 지시문을 해문하는데 쓰이는 난수표입니다."

지시문과 난수표를 뜯어보는 순간! 형권은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깨알처럼 빼곡하게 박힌 다섯자리 숫자가 각각 5천조씩이나 되니.... 이걸 언제 어떻게 다 해문한단 말인가!'

내용도 궁금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전문을 해독하기 위해 박군을 호출했다.

호출을 받고 달려나온 박군이 걱정어린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형님, 무슨 급한 일이 있습니까?"

"아아니, 그렇게 걱정할 건 아니야. 나하고 같이 풀어야 할 문제가 있어서 불렀는데 며칠 동안 시간 좀 낼 수 있겠나?"

"네, 학교 며칠 빠지면 되지요."

"종수, 전 번에 평양 갔을 때 통신교육도 다 받았겠지?"

"네, 다 받았습니다."

그럼 됐어.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하기로 하고 우선 저녁이나 먹자구."

"....."

"오늘은 밤 새워 일해야 하니까 체면 차리지 말고 든든히 먹어야 돼."

"무슨 일인지 궁금한데요!"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으면서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형권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경찰에 연행됐던 친구들, 풀려났다면서?"

"벌써 알고 계셨군요? 며칠 됐습니다. "

"특별한 혐의는 없었나 보지?'

"네, 작년에 유신헌법 반대 데모에 나갔을 때 체크되었던 모양입니다. "

"고문은 안 당했대?"

"취조 과정에서 발길로 몇 번 차이긴 했지만 심하게 당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송죽회, 일송회 조직원들은 절대 시위에 나서지 못하도록 잘 단속하게. 그 조직들은 비합법 조직으로 발전시키고 그 학생들도 핵심간부로 키워야 되네. 알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사나이들은 으슥한 골방에 마주 앉아 전문을 풀기 사작했다.

전문에 난수표를 대입하는 1차 변신은 박군에게 맡기고, 그 결과를 암호표에 대입하는 2차 변신은 형권이 맡았다.

박군은 두뇌가 명석한 학생이라 속도가 여간 빠르지 않았다. 약 1천 조를 풀고 나니까 새벽 5시가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1천 조를 풀었으니 낮 시간까지 다해서 이런 속도로 나간다면 남은 4천 조를 푸는 것도 이틀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이렇게 두 사람이 낮과 밤을 이어 지시문을 모두 해독하고 보니 그것은 그 동안 평양의 공작팀이 각각 관리하고 있던 일부 현지 조직들과의 접선 암호와 특정 조직원들의 기록대장이었다.

기록 대장에는 발전소, 전신전화국 등 요충 부문에 점 형태로 특별관리하던 개별적 대상도 있었고,  2~3명 또는 4~5명으로 구성된 조직도 있었다.

그 중에는 최근에 구성된 조직도 있고 60년대 초, 중반에 포치된 교수와 박사들로 구성된 조직, 언론계, 종교계, 공공기관, 그리고 각 단체에 뿌리 박은 조직들도 있었다.

박군은 기록대장에서 몇몇 알 만한 사람들의 이름이 눈에 띄자 놀라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종수! 왜 그렇게 놀라나?"

"....!? 이런 분들도 이미 북하고 선이 연결돼 있었습니까?  정말이지 저는 이런 저명인사들이 그런 활동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 종수! 지금 우리가 해문한 이 기록대장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거야. 그리고 종수는 이 몇 사람을 보고 놀라는거 같은데 그보다 더 중요한 권력 핵심부에도 적지 않게 포진돼 있단 걸 알면 뒤로 벌렁 자빠지겠네!"

"형님 말씀 듣고 보니까 더 힘이 생깁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그럴 줄 몰랐습니다. "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단두대에 서슴없이 올라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야. 지금 우리하고 손을 잡고 유신 헌법 반대에 나서고 있는 그 많은 저명인사들 중에서 당과 혁명을 위하여 목숨을 던질 수 있는 혁명가는 몇 명밖에 안되거든!"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 중에는 물론 건실한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그 앞에서는 목청을 돋구어 내로라 하다가도 아무도 없는 캄캄한 산중에 홀로 있을 땐 잡초만도 못한 그런 사람들이 많지..."

"....!"

"그런데 종수는 이미 사선을 헤치고 혁명학원에도 다녀왔고 , 고귀한 당원의 영예를 간직하고 있는 어였한 혁명가란 말이야."

"....."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고 놀랄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 사람들이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대열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우리가 잘 이끌어 주어야 돼. 무슨 뜻인지 알겠지?"

"형님! 외람되지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구."
"형님께서 지금 맡고 계신 직책이 무엇입니까?"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작년에 발명특허 건도 그렇고 민주화운동 하신다면서 저를 평양으로 가게 하신 것도 다 연극이었지요?"

"연극이었다면! 도루 물러달라고 할 건가?"

"무르긴 제가 왜 무릅니까? 저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형님하고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지 모르겠습니다. "

"나도 종수를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이 일도 맡길 수 있었던 거야."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그리고 종수가 지금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좀 더 있으면 차차 알게 될 거니까 그렇게 알아두라구....."

"말씀 안하셔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형권은 비상연락 수단을 동원하여 긴급이사회를 소집했다.

김이사와 강이사는 1분도 어김없이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정각 10시, 예정된 시간에 개회 선언과 동시에 안건이 제시됐다.

"오늘 긴급이사회에서 토의할 안건은 첫째, 중앙으로부터 넘겨받은 현지 조직에 대한 검열 절차 문제와 둘째로, 재정관리 문제, 셋째로, 현지당 지도부의 아지트 구축문제 이 세 가지 문제입니다.

"아니, 그 5천 조나 되는 전문을 벌써 다 해문하셨습니까?

"네, 오늘 새벽까지 다 끝냈습니다."

새벽까지 끝냈다는 말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럼 먼저 전문내용을 발표하겠습니다. 중앙으로부터 인계받은 기록대장에 의하면 우리가 우선 검열해야 할 대상조직은  모두 94개 조직입니다. 그 중에서는 발전소와 변전소, 철도, 체신, 방위산업체, 군부대 등에 포치된 1 형태의 점조직이 23개이고, 제2, 제3 형태조직의 분포상황을 보면 대학가에 19개, 종교계에 7개, 언론분야에 5개, 문화예술단체에 4개, 각종 사회단체에 16개, 산업현장에 12개, 그리고 기타분야에 8개 조직입니다. 이 조직들을 어떤 절차와 방법으로 검열했으면 좋겠는지 의견이 있으면 개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

김이사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현 상태에서 재정관리하고 아지트 구축문제는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맡아보시는 것이 좋겠고, 현지 조직에 대한 검열 문제는 강 이사님하고 제가 담당 분야별로 맡아서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결국 김이사의 의견대로 재정관리와 아지트 구축문제는 회장이, 그리고 김이사가 특수공작 분야의 조직, 강이사는 일반공작 부문 조직을 각각 맡아 검열하기로 분담했다.

그리고 검열절차와 방법에 있어서는 믿으면서 경계하고, 경계하면서 옥석을 가려내는 마음으로 신중성을 기하되 부실한 조직은 미련없이 잘라 버려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다음날부터 현지조직들에 대한 검열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검열결과도 매일 한두 건씩 집계됐다. 예견했던 대로 그 많은 조직들 가운데에는 견실한 조직이 있었던 반면에 공작금만 축을 내면서 움직이지 않는 조직도 있었고, 이미 파괴된 조직도 적지 않았다.
파괴된 조직의 대부분의 성원들이 긴급조치 4호와 민청학련사건 관련 혐의로 구속, 군법회의에 송치되어 수습할 수도 없는 조직이었다. 하루하루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성과가 올라가는 반면에 거기에 비례하여 파괴된 조직도 그 만큼 늘어났다.
1개월여의 검열작업을 총화해 본 결과 총 94개 조직 중 비교적 견실하고 공고한 조직은 68개에 불과했고, 파괴된 조직이 9개, 나머지 17개 조직은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드러났다. 이 사실이 그대로 평양에 보고될 경우에 평양의 일부 공작팀은 초상집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허위로 보고할 수도 없었다.
검열 결과 비교적 견실하다고 나타난 조직들에는 평양에 갔다온 대상이 백여명이나 있었고, 그 중에는 혁명적 세계관이 확고한 핵심들도 적지 않았다.

형권은 그들을 장차 지하당 각급 지도부의 핵심간부로 키우기로 결심했다.

 

민청학련 부분 全文 278~ 304 page.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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