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세력이 일본의 대대적 토벌에 쫓겨 국경을 너머 러시아로 도피했습니다. 러시아의 적군 세력은 일본군 토벌을 피해 영내로 들어온 독립군을 러시아 적군 산하 한인 부대로 편입하려고 했지요. 이를 두고 독립군간 이견이 갈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통합된 독립군의 주도권 다툼처럼 보이지만 러시아 적군(공산군)이 되느냐 독립된 대한 독립군 세력으로 존속하느냐의 대립이기도 했습니다.
적지 않은 독립군이 적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지만 거부한 독립군도 있었습니다. 김좌진 등은 병력을 이끌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지요. 허나 만주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체 적군은 제안을 계속 거부한 독립군도 있었습니다. 적군은 이들을 무장해제 시키려 했고 그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 자유시 참변이지요. 수십 혹은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생존자들은 반란 혐의로 체포되어 죄수 부대 혹은 강제노동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홍범도는 적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다만 홍범도가 무장해제 임무에 가담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한건 자유시 참변 생존자들이 군사재팬에 회부되었을때 그 군사재판에 홍범도가 재판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군사재판은 생존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었다는 겁니다.
직접 학살에 가담했던 안했던 독립군 탄압과 소멸 작업에 협조했고 이후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훈장도 받고 공산당에 가입해 독립운동과도 결별하고 비교적 안락하게 살았다는 건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변절 행위로도 볼 수 있는 일이죠.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독립군 인물 두 명이 홍범도를 찾아가 이 때 일을 두고 원망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홍범도는 레닌에게 선물 받았다는 권총으로 이 2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혁명정권에 협조해준 감사의 표시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받고 기념촬영을 한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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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이메일(으)로 기사보내기 다른 공유 찾기 기사스크랩하기■ 독소전쟁 발발하자 소련신문 '레닌기치'에 게재
한겨레는 "홍범도 자유시 참변 가해자 주장, 극우 괴담"이라지만
레닌에게 금화·권총·군복 하사받은 명백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자유시 참변' 후 독립군 2명, '배신자 홍범도' 공격 치아 부러지자
레닌이 하사한 권총으로 살해...살인죄 체포됐지만 레닌이 '석방'
8월 30일자 한겨레신문은 <홍범도 ‘자유시 참변’ 주도? 학계 "무장해제·진압 간여 안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의 독립군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또 한겨레신문은 홍범도의 자유시참변 가해자설은 일부 극우 커뮤티티의 괴담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홍범도는 1941년 독소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의 신문인 ‘레닌 기치’에 스탈린에게 공개 충성편지를 썼다. 당시 72세였던 그는 스탈린에게 "비록 몸은 늙었지만, 전선에 나가 싸우고 싶다"고 했다. 또 ‘레닌 기치’에 투고하며 고려인 청년들에게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라는 참전 독려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1943년 그가 사망하자 소련에서는 고려(대한)의 독립운동가라는 말 대신 "조선 빨치산 운동의 거두, 레인-스탈린당의 당원, 조국(소련)과 볼세비키당에 충직한 사람"이라는 부고 기사가 났다(조선 레지스탕스의 두 얼굴).
홍범도는 명백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1920년 전후로 연해주로 넘어가 이동휘 등과 연계를 맺던 시절부터 사회주의 경향을 띠었다. 물론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실체를 잘 모르고 이런 경향을 띤 사례가 많다.
문제는 홍범도의 행적이다. ‘자유시 참변’은 홍범도를 재평가를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자유시 참변’은 레닌 정부가 만주와 연해주의 한인독립군을 제거하려고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모이게 한 뒤 소비에트 적군으로 편입시키려다, 반발하는 한인 독립군을 기관총과 장갑차를 동원해 무차별 공격하여 학살한 사건이다. 가해자는 레닌 정부 산하의 ‘극동 공화국’ 적군과 이르츠크파 공산당이었다.
‘자유시 참변’으로 3500여 명에 달하던 한인 독립군은 400~600명이 사망하고, 익사자와 실종자 등이 100여 명에 달하고, 700명 정도가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잡힌 독립군 중 72명의 독립군 장교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받고,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으로 죽어갔다.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 청산리 전투의 주력부대였던 ‘의군부’였다.
이때 홍범도는 가해자 측인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담한다. 30일자 ‘한겨레’는 좌파 역사학자들이 이를 "통합하기 위한 중재자 역할(윤상원 전북대 교수)"이라거나 "학살에 참여하지 않고 통곡했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또 3인의 재판위원 중 1인으로 활약한 것도 "(독립군을) 구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홍범도의 변절에 대한 ‘한겨레’와 좌파 역사학자들의 구차한 변명이다. ‘자유시 참변’ 후 모스크바의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한 홍범도는 트로츠키와 레닌을 만나 감사 인사를 받고, 100루불의 금화와 군복과 권총을 하사받는다. 그 후 홍범도는 적군 소속 고려혁명군 대위가 되었다.
또 고려혁명군은 아무런 전투도 벌이지 않았고, 적백내전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정되는 1922년에 그 임무가 끝났다며 코민테른으로부터 해산명령을 받았다. 해산된 홍범도 등은 항카호 근처에서 재혼해 농장(콜호즈)을 일구고 살면서 1927년에 정식으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농장에서 일하던 1923년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 측인 사할린파 김창수와 김오남이 홍범도의 배신행위를 추궁하며 공격했다. 그들의 공격으로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자, 홍범도는 레닌이 하사한 권총으로 이들을 살해했다. 그 일로 홍범도는‘살인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레닌이 친서를 써주어 석방되기도 했다.
레닌의 단독 면담과 감사 인사, 군복과 권총, 금화 100루불 하사, 그리고 피해자 측인 사할린파 김창수, 김오남의 공격은 홍범도의 행적이 ‘한겨레’서 소개한 좌파 역사학자들의 구차한 변명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인 독립군을 제거하는 소련 공산당의 의도에 동조해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고, 그 공으로 레닌과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용삼 칼럼리스트는 "사상적 동지였던 이동휘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해 동료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섰던 사람이 홍범도다"라며 "그래서 레닌으로부터 고맙다며 격려금과 권총까지 선물로 받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