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3:16> <Nahum 1:7>
발행인 (Publisher/Editor) 배 부 전, Simon (Bu Jun) Bae, Tel. (213) 305-7100
신문창간일자 1982년 2월 11일, 인터넷미디어창간 1999년, TV방송 개국 2003년 11월
3010 Wilshire Blvd. P.O. Box 1000 Los Angeles, CA 90010 U.S.A.
미국 LA 카운티 등록 1982년 2월 11일 등록, 이메일: simon@unity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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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 천 사



저자는 이민 목회자의 사모로서 거친 들판을 개간하여 옥토를 만
드는 농부와 같이 개척교회를 세워 수고하시는 목사님을 도와

성공적으로 목회하도록 내조한 사모요, 아내요, 네 자녀의 어머니입니
다.
    동양선교교회를 개척하여 오늘날 미주 큰 교회 중의 하나로 성장케
하기까지는 수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성공한 목회자의 뒤
에는 훌륭한 사모가 있게 마련입니다.

    흘륭한 목회자는 가정의 희생이 따르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다고
봅니다. 저자는 남편의 목회를됫바라지했으며,네 자녀의 어머니로서
생활을 이끌어 나가야만 했습니다. 또한 어머니로서 자녀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흘륭히 키워냈습니다. 저자는 가사를 돌보기 위해 두세
군데의 직장을 전전하면서 남편과 자녀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란 시간을 내어 밤에는 골방과 교회에서 무릎이 닳도록
기도로 목회를 도왔습니다.
    급기야 그는 기진하여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애달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자비로우
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새로운 은혜를 받아 다시 일어섰습니
다.

    남편 임동선 목사님이 고귀한 빛을 발하기까지 그 뒤에 숨어 있었
던 수많은 애절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이 책에는 적막의 아름다움, 슬픔의 아름다움, 허무의 아름다움이
잘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허무는 하늘문을 열었고 새로운 사명을 받
게 했습니다.

    수기 「이민 목회자의 아내」는 고난의 연단사이며, 영광의 문이며,
찬란하게 빛나는 승화의 비사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빛도 없이 이름
도 없이 그늘에서 수고하시는 여러 사모님들과 모든 여성들에게 하나
님의 위로와 평강을 전할 것이므로 좋은 지침서가 될 줄로 믿어 일독
을 권하는 바입니다.

                                                         1999년 11월 1일
                                                                 배 기 섭
                                (목사, 전 미주기독교문인협회 회장)



                        --------------------------




< 머 리  말 >


회갑(1984년도)을 맞으면서 긴 인생길을 회고해 볼 때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행복했다기보다 숨가쁜 역경의 고비가 많았습니

다.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험준한 굴곡도 많았고 눈물 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인생 여정의 흔적이 마음을 흔들어 놓아 붓을 잡아 보았습니
다.
    경상도 산골에서 태어나 남달리 일찍이 복음에 눈을 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는 신앙생활이 험난했고, 또 핍박도 많았습니다. 태산같
이 밀어닥친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밝은 등불
이 되어 주셨고 저로 하여금 전도자의 길을 밟게 해주셨습니다. 이것
이 하니님의 섭리임을믿고 목회자의 아내로서 신앙의 토막토막을  회
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인생 행로 중 병으로 사경을 헤매며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화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고 가는
우리의 인생길에 보다 소중한 길잡이가 되어진다면 큰 기쁨과 보람으
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지가지 받은 은혜가 크건마는 글 쓰는 재주
도 없고 몸도 불편하여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
각합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한 토막씩 기록하였으므로 미진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저의 중심만 전달된다면 큰 기쁨으로
생각하겠습니 다.

평소 저를 위해 희생하신 어머님께 불효를 씻을 길이 없으나 어머님
을 향한 이 딸의 사랑을 이 글로 사죄 드리고자 합니다.
    인생 행로에 있어서 교역자의 아내의 길이란 참으로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희생 없이는 못가는 길입니다. 때로는 쓰러지고 후회할 때도
있는 길입니다.
    동역자의 아내들이여!
    같은 길을 걸어온 동역자의 수기가 여러분의 사역에 도움이 된다면
중심을 펼쳐 놓은 보람을 찾았다고 봅니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앞에서 이끌어 주신 배기섭 목사님과
원고 정리에 수고하신 김문희 집사님, 뒤에서 밀어주신 김충남 목사님
께 감사를 드립니다.
    허술한 인생을 살아온 허물투성인데 이 간증집을 내 일생의 전부라
고 보아 함께 정성을 기울여 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
다.
    이 간증집은.1985년에 출판된 것을 개정하여 다시 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수고해 주신 쿰란출판사 이형규 장로님에도 감사를 드립니
다.

                                                   1999년 11월 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임 재 순




차례

추천사 · 배기섭 목사 /2
머리말 /4

제1부 해방이 되기까지

전송 / 10
내 고향 예천 / 12
여학생 / 15
첫번째 방학 / 17
삯바느질 / 19
우편물 /23
만주에서 온 소식 /27
하얼빈 역 /30
사회의 첫걸음 /33                                                
학교 교사로 / 31                                                 
귀극열차 / 38                                                    


2부 한국을 떠나다
병으로 쓰러지고 /44
소생의 그날 /46
고학생에게 /48
결혼 /52
신학생 시절 /55
여주 개척교회 /58
한국전잼 /61
피난 길을 떠나다 /65
1 ·4후퇴 /68
하나님, 제 아들을 /71
온천동교회로 / 71
공군 군목으로 입대 / 81
사천비행장으로 /84
서울로 전속 / 88
미국으로 떠나 보내며 /91


3부 미국생활
상봉 /96
"발 뒤꿈치를 들고 다녀요!" /99
봉제공장 / 101
유학싱 뒷바라지 / 104
노력하는 식구들 / 107
중노동의 날 / 110
기술자가 된 나 / 113
땀은 흘려도 / 111
교회 건물 구입 / 118
땀 흘리는 여성도들 / 121
나의 어머니 /124
나의 꿈나무 / 128
교역자의 아내 / 131

제4부 투병기
발병 / 136
병과 나 / 141
바보 / 147
시련은 또 다시 / 154
대화 / 158
흐르는 피 / 162
중국에서 가지고 온 약 / 164
그리스도의 사랑 / 166
나의 소원 / 168
사남매 /173
고향에 가다 / 180


제5부 어행기
남미선교여행 / 190
     ■ 브라질리아 /200
     ■ 리우데자네이루 /202
땀을 닦아주며 '안식년'을 /205
동남아선교여행 /208
  1. 1차 여행 /208
      ■ 호주 /208
      ■ 뉴질랜드 /210
      ■ 필리핀 /212
      ■ 인도네시아 /214
      1 방글라데시 /216
      ■ 인도/218
      ■ 태국'/221
      ■ 홍콩 /224
      ■ 대만/226
  2. 2차 여행 /228
      * 중국 /228
      * 일본/234
성지 순례자가 되어 /238
      ■ 요르단/이스라엘/이집트 /238/411 / 245



제 1 부 해방이 되기까지


전송

    일제 말엽 전시의 학교생활은 온통 전쟁과 연결되어 엉망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역에 나가 병정들을 전송(오미오꾸리)하라는
전달이 왔다. 이때는 항상 1학년생이 나가야 했다.
     "일학년생 전원 운동장으로 집합!" 학교 비상 종소리와 함께 교무
실 지도 선생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교실에서 일제히 운동장
으로 나갔다. 열을 지어 손에 일장기를 들고 2마일이 넘는 대구역까지
걸어가야 한다. 역에 도착하면 일장기를 흔들면서 목청 높여 '갓대구
루소도(일본 군가)' 를 불러야만 했다. 긴 열차 칸칸마다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 지친 모양이었다. 우리의 환
송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던 그들은 긴장한 모습과 웃음을 잃은 무표
정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
며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군인들을 가득 실은 이 기차는 북으로 북으
로 서울, 평 양,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가서 다시 중국대륙으로 가는 것
이다.
    기차가 몇 날 며칠을 달리는 동안 쉬어가는 역마다 이처럼 아무것
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여 승전을 기원하는 전송을 강요했다.
동원되는 군인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학생들의 피곤함은 날로 더해갔다.

기차에 타고 있는 군인들은 일본 사랐들만이 아니어서 한국 청년들
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되어 끌려갔다. 부모와 처자를 두
고 죽음의 전장을 향하여 떠나가는 처량한 모습들이었다. 일본제국은
증일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당시 조선에 강력
한 전시 시책을 펴나가며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전송(오미오꾸리)은
일본제국 당국의 당당한명령이라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복종해야 했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기독교 계통의 미션스쿨에서도 강행되고 있는 형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방요배, 국민의례 등 감시가 심했다. 아무리 귀중한
시간이라도 방공연습 사이렌이 울리면 어두컴컴한 방공호 속에서 숨
을 죽여야만 했다. 일본제국은 패망 막바지에 이르자 점점 기승을 부
리더니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성씨마저 빼앗아
버렸다. 성도 이름도 일본식의 이름이고 일상생활의 방식도 모두 일본
식으로만 통했다. 심지어 한글도 폐지시켰으며, 사용하면 징벌을 당하
였다. 일본말이 국어가 된 시대가 되었으니 실로 서글픈 세월의 연속
이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들은 전송을 끝마치고 귀교하면 기진하여 쓰
러질 정도였다. 기숙사로 돌아와서 때늦은 점심을 먹는데 잡곡밥 한
덩이와 부식이라고는 김치 또는 시래기 국이 전부였다. 그 밥을 먹고
수저를 놓으면 다시 배가 고팠다. 허기진 학생들이 누룽지라도 얻어
먹으려고 식당 아줌마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떠는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했다. 부잣집 딸들은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을수 있었지만 나에게
는 그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긴긴 겨울밤을 허기지고 배고프게
보냈다.



내 고힝 예천

    태백산 줄기의 등을 타고 내려온 소백산이 가로 놓인 깊숙한 분지
에 자리잡은 소도시 경상북도 예천이라는 곳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곳
은 완고한 분위기의 지방으로 소문이 나서 여자들은 보통학교에도 잘
보내지 않아 한 학년에 여자가 모자란 탓으로 남자들과 합반 해야 하
는 형편이었다. 여자는 보통학교를 마치면 가정에서 가사를 돕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여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지방 유지나 부잣집 자녀
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반농반상의 주민들을 상대로 포목점을 경영했다. 중국사
람과 교역하며 피륙을 파는 비단장사로서 집안 형편은 비교적 넉넉했
다. 그러나 가끔.부도도 났고 빨간 딱지도 붙어 부모님이 당황해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나의 여학교 진학은 그 지방에서 크나큰 화제였다. 큰집, 작은집 할
것 없이 사촌들도 부모를 조르는 형편이었다. 완고한 친척들은 돈도
돈이지만 여자를 공부시키면 품행이 나빠져서 시집도 못가고 건방이
들어서 집안 망신할 것이라는 이유로 완강하게 반대 의사를 보였다.
심지어 동네에서는 부자도 아닌 주제에 상급학교에 보낸다고 빈정거
리는 뒷소리가 파다했다.

    부러워하는 친척이 있는가 하면 질시의 눈길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온 집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예수를 믿으니 아니 천주학
(당시는 천주교를 천주학이라고 불렀으며, 이 말은 큰 욕이었다. )을
하니 망신살이 뻗쳤다며 호통을 치는 어른들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의 도우심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 예천읍장로교회의
김한기 장로님과 어머니께서 비밀리에 추진해 주신 결과였다. 어머니
는 교회에 다니심으로 개화사상에 일찍 눈을 뜨신 분이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것과 지식을 터득함으로써 진보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깨달은 분이었다. 무식했던 어머니도 교회 야학당에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통독하게 되었다. 이토록 배움의 중요성을 인식하신 어머니는
믿음이 좋으신 장로님과 의논하여 나를 배움의 길로 인도하신 강한 어
머니였다. 참으로감사를 드린다. 어머니는 용기 있는 믿음의 여성이
었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본래 우리 집안은 옛부터 불교가정으로 미신과 무당굿 등에 열심이
었다. 그때 우리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 갓난아기가 병명도 없이 시름
시름 앓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애가 탄 어머니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
하기에 이르렀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떠놓고 불공을 드리는가 하면 미
신을 섬기며 빌고 또 빌었다. 어머니는 뒤늦게 미신이 헛된 것임을 깨
닫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그때부터 죽어가던 아이의 상태가 차차
회복되었고 어머니는 마음에 약속한 대로 아이를 등에 업고 교회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복음만이 올바른 길임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
으니 우환이 도리어 복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변화를 본 집안에서는
본격적인 반대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조상의 제사도 모시지
않는 불측스러운 예수를 믿는다고 구박이 대단했다.
그 노여움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핍박이었다. 어머니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참 길이요,진리요, 생명
인 예수를 믿었기에 무서운 핍박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실로 완
고하기로 유명한 경상도 지방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킨 장갑성 여장부
라 하겠다. 이러한 어머니 덕분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신앙적인 용단은 내게 있어서 일생을 통해 최대의 선물이
되었다. 드디어 나는 여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남들은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지만 위대한 혁명은 자식을 위한 진정한 사랑이었고 한 여성을
훌륭히 키워 내려는 크나큰 포부였음을 알 수 있었다. 김한기 장로님
께서는 이러한 어머니의 뜻에 감화되어 나의 인도자가 되셨다. 딸을
진학시킨 어머니는 많은 핍박 속에서도 기도로 굳건히 이겨 나가셧다
    나는 예천읍에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고드디어 대구에 있는신명
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신명여학교는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하고 지원하는 학교로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
는 학교였기에 내게는 적합한 학교였다. 어머니의 기도로 이루어진 나
의 입학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고 꿈과 이상을펼칠 수 있는
계기였다.


여학생

    대구는 분지로서 겨울이 춥고 길었다. 아직 남은 꽃샘 추위와 함께
봄의 정취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설레는 마음을 안고 대구
로 올라왔다. 시골뜨기인 나는 새로운 환곁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예천과는 달리 대구는 넓은 도시였으며 건물도 우뚝우뚝 높았고 사
람들도 바쁘게 왕래했다. 일단 기숙사에 입사한 후 단체생활이 시작되
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했지만 남들도 하는 일인데 나도 해보자
는 결심으로 열심히 익혔다.
    치마 저고리에 길게 머리를 땋은 시골 처녀 차림부터 변화를 시도
했다. 먼저 간단하게 머리를 잘라 단발머리로 바꾸었다. 치마저고리를
벗고 지정된 학교의 교복인 세일러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나는 완전
히 도시의 여학생으로 변신되었다. 등 뒤에는 신명여학교를 표시한
SM이라는 영어 글자, 양쪽에 달린 칼라에 치마에 주름까지 세워 입고
구두까지 신게 되니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
행복해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울고
있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점점 철이 들고 성숙해 갔다. 부모를 그
리워하기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머니께 보답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골티를 벗었고 시야도 넓어졌으며 사고빙식
이나 행동도 달라지게 되었다. 여성으로서 좁은 안목이 점점 트여지는
것을 느꼈다.
    공부를 시키면 거만해지고 집안 망신이 된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무
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의 의지가 깨우쳐짐에 따라 높은 세계를 지
향하여 폭넓게 사는 정신을 배웠기에 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소녀로서 혼자 기숙사에서 단체생활을 하면서 눈물로 기도하
며 '장차 나는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깊은생각에 잠
기기도 했다. 하나님께 이 엄청난 사실에 감사하며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였다. '이 시간에도 나의 어머니는 딸을 멀리 보내고 간곡한 기
도를 드리시겠지? 얼마나 나의 책임이 크고 막중한가'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벅차 올랐었다.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나 여름방학이 되었다. 기숙사생들은 짐을 꾸
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4개월 동안을 지루한 줄 모르고 공부에 쫓기다
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막상 기차에 오르니
부모 형제가 있는 집이 몹시 그리워졌다. '나의 변모를 보고 나의 어머
니의 반응은 어떨까? 친척들의 핍박에도 굳건히 견디시던 어머님을
위로 해야지, 어린 동생들도 더 사랑해 주어야지.' 마냥 마음이 부풀어
기차여행이 지루한 줄 몰랐다. 석앙 해가 질 무련 서쪽하늘에 깔려 있
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집에 도착했다.


첫번째 방학

    가까운 친척은 물론이고 먼 친척 사이에서도 일대 소동이 일었다.
첫째, 가장 어른이신 할아버지께서 아침저녁으로 집안에 들어서시면
서 호통을 치시는 그 시달림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맨
처음 나를 보시더니 기절초풍하셨다.
    "저 왜년! 일본으로 당장 썩 꺼져라. 저런 왜년은 집안에 둘 수 없
다.
    그렇게도 나를 귀여워 해주시던 할아버지셨는데 개화된 내 모습에
분노가 치솟았던 모양이셨다.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던 우리 나라가
어쩔 수 없이 개항을 하고 개화의 바람이 일자 특히 완고한 집안에서는
저항이 대단했다.
    나는 그러한 할아버지가 무서워 슬슬 피해 다니기만 했고 즐거운
방학을 우울하고 짜증스럽게 보냈다. 방학 동안 할아버지께 인사한번
드리지 못한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제일 마음 아팠던 것은
어머니께로 그 화살이 갔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왜년을 만든 책임'이
어머니가 예수를 믿기 때문이라고 꾸중을 하셨다. 예수를 믿는 핍박이
가일층 불붙는 듯 했다.
    할아버지는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성경,찬송을 빼앗아 찢어서
아궁이 속에 집어 던져 버렸다. 우리는 눈물로 기도드렸다. 발에 불덩어
리가 떨어지는 듯한 상황 아래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뿐이
었다. 주일이 되면 할아버지는 대문을 지키고 서 계셨다.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감시하시며 "저 천주쟁이가 우리 황씨 문중을 망치는구나.
우리 문중의 체모를 예수쟁이가 망친다. "라고 하시며 걱정이 대단하셨
다. 사실 나의 어머니는 열여섯 살에 시집와서 예절이나 시부모님 공
경에 칭찬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양갓집 며느리로 소문이 나 있었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가정의 질서는 흐트러졌고 조상의 제사도 모시
지 않으니 그 지탄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불교 가정이었던 황씨 문중
에서 불공 역시 드리지 않았고 그렇게 열심이었던 어머니의 변화에 이
제는 온 집안이 부정탄다고 더욱 질색이었다. 모진 풍파는 슬며시 다
가오기도 했고 파도를 타고 아우성 치면서 몰려 오기도 했다. 나는 시
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한 성경의 말씀을 믿었다. 믿음이 없
이는 단 한 시간도 살 수도 호흡할 수도 없는 절망 상태였다. 한편 아
버지는 양쪽사이에서 견디지 못하시고 하시던 사업을 큰아버지께 맡
기고 멀리 북만주 땅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삯바느질

    할아버지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한편 어머니는 고통속에서도
믿음의 씨앗을 키워 가셨다.
    어머니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기 위하여 한글을 배웠고 자녀들에게도 성경읽기를 권하셨다. 우리
가정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침과 저
녁에는 가정예배를 드렸으며 주일이 되면 자녀들에게까지 목욕을 하
게 했다. 자녀들이 성경을 외우지 않으면 밥도 못먹게 하는 완고한 기
독교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자신이 다녀보지
못한 학교에 자녀들을 꼭 보내서 자신이 못다한 일들을 그들이 해주
기 원하셨으며 주위의 극심한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굳은 의지와 투
지력으로 밀고 나가셨다. 어머니의 이러한 굳은 의욕으로 나는 공부
를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1924년 7월 30일 경상북도 예천읍의 번창한 항씨문중에서 태
어났다. 대소가 친척들이 넓게 한 동리를 이루고 살면서 대대로 농사
와 장사로 지방 경제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부친 황학섭 씨의 장녀인 동시에 4남 1녀 중 고명딸이었다.
    피륙장사를 하셨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시골에서 보기
드문 고운 옷차림으로 행복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는 일시
에 풍파가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북만주로 떠나셔서 홀로 계
신 어머니를 날마다 꾸중을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얼굴색 하나 변
하지 않았다. 보다 값진 복음이 그의 중심을 차지한 까닭이었다. 생각
이 깊은 친척들은 어머니를 우러러보고 격려와 동정을 보내기도 했다.
치마를 두른 여장부라고 뜻을 모아 주기도 했다.
    핍박이 닥쳐오고 시련이 올수록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무섭게 용솟

음치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이것은 믿음이었다. 어머니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 어려움을 승리로 이끌수가 있겠는가?
    할아버지는 큰 아버지와 합세하여 어머니의 뜻을 돌이키려고 온갖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경제면에서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어머니는
외로웠다. 남편이 머나먼 북만주 땅으로 떠나버려 생활면에서도 어려
움이 닥칠 때 하나님만을 믿고 위로받을 뿐이었다.
    "자비의 하나님!우리 가정에 평화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무서운 시련을 이길 수 있게 도와 주소서 !"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과 주님만을 붙들고 나아갔다. 어
머니는 이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녀자의 몸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다. 그것은 삯바느질이었다.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굳건히 현실을 헤쳐 나아가는 본을 보여 주셨
다. 대구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도 학비가 왔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내가 어머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은 열심
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기숙사에서 다른 학생들은 잠을 잘 때에도 나
는 눈을 비비며 한자라도 더 익히기 위해 피맺힌 노력을 했다. 이때 나
는 마음속에 평화의 천사가 찾아온 것처럼 포근함을 만끽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사랑의 하나님! 어머니가 용기를 잃지 않고 굳세게 살게 하옵소
서 !"
     겨울방학이 되어 짐을 싸가지고 집으로 왔다. 집안은 옛날과는 달
랐다. 있어야 했던 물건들이 하나둘 없어진 것이다. 장롱도 없었고 금
반지, 은수저 등도 보이지 않았다. 애지중지하며 아끼던 물건들이 다
없어지고 말았으니 어머니는 얼마나 그 심정이 괴로울까 싶었다. 그러
나 어머니는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더 좋은 가보가 있더라
도 처분하였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어머니는 굳은 의지로 자신의 환
경을 정돈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머니 ! 학교를 그만 두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별로 잘난 점도 없
고 어머니가 기대하는 만큼 훌륭한 인재도 못돼요."
    어머니는 가구가 없어지고 생활에 곤경을 겪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
는 내말의 의미를 아셨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잡으며 이렇게 말을 이
으셨다.
     "보잘것없는 돌멩이 하나도 하나님이 쓰시고 싶으실 때 쓰게 만들
어야지. 네가 그만한 일에 견디지 못하면 어찌 이보다 더 큰 일을 하겠
느냐."
    손에는 힘이 전해졌고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의 심정을 이렇게도 몰랐구나 싶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대
구로 올라가 더욱 분발했다.
    나도 이제는 일자리를 구해서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최소한 학비
라도 벌어 쓰기 위해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나에게 조그
마한 일자리라도 주십사고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쾌히 승낙을
하셨다. 내게 주어진 일은 학교 강당청소였다. 나는 학비면제를 받고 한
학기에 3원씩 받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일하면서 공부하게 됨을 하
나님께 감사드렸다.
    어머니의 고생도 조금은 덜어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머니를 고생시키면서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언제나 내 머리
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께 편지를 보낼 때마다 나는 눈물로 글을
쓰게 되었다. 나를 공부시키는 것이 어머니의 의지요,자랑이 될지는
모르나 나로서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이렇게 한 학기가 또 흘
러갔다.



우편물

    기숙사에 우편물 하나가 와 있다고 했다. 나는 우편물을 가지러 사
감실로 가서 우편물을 개봉하였다. 기숙사생에게 오는 우편물은 어떤
것이든지 사감 앞에서 검열을 받아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우
편물을 뜯어보니 책 한 권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 여인의 신앙간증
기를 읽으시고 은혜가 되어 나에게도 보내 주신 것이다.
    어머니는 딸에게 당부를 하였다. 너도 이 여인처럼 훌륭한 여성이
되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나의 심정을 알지 못
하고 계셨다. 나는 가난을 헤치며 이겨 나가고 있었다. 장래에도 가난
한 삶을 되풀이 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내 심정을
너무나 모르고 정말 너무한 것 같았다.
    나의 꿈은 장차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부모님을 호강시키고 각박한
우리의 환경을 바꾸는 것인데, 가난과 더 씨름하라구?
    나는 그 책을 집어 던졌다. 너무나도 야속했다. 딸의 심정을 이렇게
도 물라주다니‥‥‥‥ 그렇게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께로부터 편지가 또 왔다. 해답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돈도
얼마간 보내 주셨다. 나는 던져버렸던 책을 다시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방애인(당시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이라는 주인공이 그리스
도의 사랑으로 불쌍한 고아들과 문둥병자를 위로하며 사는 내용이었
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어요. 무서워요. 세상에 이런 여인
도 있단 말이에요? 소름이 끼치는군요. 나는 남들이 말하기를 미인이
라고 해요. 세상에 태어나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
대로 먹고 살기를 원해요. 왜 굶고 살아요.
    나는 돈을 가지고 불쌍한 사람을 도우면 도왔지, 왜 장애인과 같이
몸으로 사랑과 희생을 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독후감
을 편지로 어머니께 보내야 했지만 도저히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어
머니의 기대에 어긋나는 내 입장을 보일 수가 없어서 차일 피일 미루
다가 방학이 되었다. 몇 달 동안 답장도 없이 우물쭈물 하고 있었던 것
이다. 어머니께로부터는 다시 편지가 오지 않았다. 방학이 되어 집으
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반가이 맞아 주셨다. "제법 컸구나! 이젠 처녀틀이 잡혔
어!" 어머니는 나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시면서 대견하게 생각하셨
다. 그날 밤 어머니는 책에 대한 소감을 물으셨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어머니! 나는 부자로 살고 싶어요. 사
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 고생만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이에
요.'
    어머니는 알았다는 표정을 내게 보여 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신앙
이 없어서 그러니까 기도해야겠다는 표점이졌다. 그렇게 얼굴에 씌어
있었다. 나는 방학 동안 어머니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두
벌 옷을 두지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식사를 할 때에
거지가 동냥을 하러 오면 자신의 몫을 몽땅 거지에게 주는 것이었다. 차
마 배가 고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다. 밤에 길가던 나그네가 찾아
와서 유숙을 요청하면 언제나 맞아 주셨다.
     한마디로 사랑의 은사를 받으신 훌릉한 분이었다. 이와 같은 훌릉
한 신앙인인 어머니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내게는 이해되지 않
는 점이 있었다. 길손에게 잠자리를 허락하는 어머니의 사랑의 행위에
비위가 틀렸던 것이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큰집으로 뛰어갔다. 동생들은 어머
니와 함께 자고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머니의 사랑의 행동에
질려버린 나는 방학이 지루하기만 하였다. 빨리 개학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의 동생들은 나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가진 편이었기에 순종하고
있었다. 나만 어머니의 행동에 민감한 편이었다. 나는 훌륭한 어머니
의 신앙을 본받지 못하고 고귀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지니고 실천하
는 그 행위에 대해 불평을 했다.
    후일 나는 이런 문제로 인해서 '사회봉사를 위해 살 것인가?' 가 나
의 기도 제목이었고, 심지어 죄의식에 사로잡혀 허덕이고 있었다 정
말 나의 사명이 고아원 보모인가를 여러 번 생각했다.
    어려운 일만 닥치면 나는 언제나 하나님께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오히려 환난이나 시험을 통해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되어짐
을 체험하게 되었다. '화가 복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막혔던 가
슴이 시원해지는 듯 싶었다. 수난과 고통은 자신을 진주같은 보물로
만든다는 말이 생각난다. 사실 고통은 내 인생을 새로운 경지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혼하지 않고 평생 주의 일꾼이 되리라고 결심하였고
동료들에게 독신주의자라는 평도 받았다. 일찍이 부모님의 이상의 차이
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던 가정생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나
는 꼭 주의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만주에서 온 소식

     1년 반만에 기쁜소식이 전해져 왔다. 북만주로 떠나셨던 아버지가
적게나마 기반을 잡으시고 가족들을 다 하얼빈으로 오라고 하시는 내
용이었다
     누구보다도 제일 반가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
공을 위해 매일처럼 기도하셨는데 급기야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어머니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넓은 나라,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자유의 땅으로 가자!"고
하시면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데 대하여 기뻐하시며, 동생들을 데리
고 아버지가 계신 북만주로 가시게 되었다.
    나는 1년 더 있으면 졸업을 하게 되므로 졸업을 하고 나서 만주
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어머니는 여장을 꾸려 북만주로 떠나셨다. 이
미 아버지는 집을 장만해놓으셨다. 다소의 가산을 처분하여 북만주로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받던 핍박은 끝을 맺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
었기 때문에 어려운 고비도 넉넉히 넘기신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쓰
러지셨다면 우리들의 형편은 달라졌으리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대륙을 찾아온 청교도들처럼 어머니는 신앙
의 자유를 찾아 북만주로 떠나셨다.
    어머니가 북만주로 떠나간 후에는 외로움이 더욱 깊이 엄습해 왔다.
사실 학교 기숙사에 있으니까 어머니가 고향집에 계시든 북만주 땅에
계시든 뵙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사
뭇 달랐다.
    고향을 떠나 부모와 헤어져 대구에서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어렸
던 나는 성숙한 아가씨로 변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졸업식이 다가왔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동생들이 북만주에 있
기 때문에 홀로 졸업을 위해 안감힘을 써야 했다. 물론 북만주로 가신
어머니는 학비를 충분히 보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반 때에는 고생을 하지 않았다. 땀 흘린 후 농부
에게는 가을의 수확이 온다. 인생의 결실도 수고 없이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삼촌께서 일본 유학을 권유하셨지만 거절
했다. 어머니 곁에 가서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부모님
고생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북만주로 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며칠 간 무
엇인가 생각에.잠겨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동행을하시겠다는 뜻을 밝
히셨다. 그렇게도 핍박하던 할아버지께서 "나도 가보아야겠다. " 하시
며 손녀 뒤를 따라 나섰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왜 나를 따라 나서시는 것일까? 손녀 혼자 보내기 안
되어서 그럴까? 아니면 자부에게 너무했다고 후회하셔서 사랑의 뜻으
로 가시는 걸까?'
    이틀 밤낮을 기차에 몸을 싣고 머나먼 북만주 땅 하얼빈으로 달려
갔다. 할아버지는 별로 말씀도 안 하시고 차창 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우리 나라에는 봄소식이 왔으나 북으로 올라 갈수록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하얼빈 역

    졸업을 하고 집을 향해 가는 기분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내 집, 가족들, 생각만 해도 몸이 가벼워 오는 느낌이었다 미지의
세계,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북만주 하얼빈 땅을 밟는다는 것과 내 부
모,형제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이기까지 했다. 이틀 동안 기
차로 계속 달려갔다. 레일 위로 바퀴가 굴러가는 느낌, 객차 사이의 연
결쇠가 약간 삐걱대며 끌리는 느낌, 기계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를 가다
가 드디어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북만주 땅은 아직 추위가 풀리지 않아서 사람들의 활동이 힘들어
보였다. 추위에 약한 나는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누더기를 걸친 마
부나 마차들은 아주 몸에 밴 양 추위에도 익숙해 보였다.
    나는 보고 싶었던 부모님,그리고 동생들의 환영 속에서 하얼빈 역
을 빠져 나왔다. 그 환희의 기쁨은 혼자 외롭게 살던 나에게는 숨가쁨
을 느끼게 했다. '여기가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쓰러뜨린 역사적인 곳인가? 어디일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의분이
솟았다. 식구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황혼이 깔린 돌로 다듬어 만든 넓
은 거리를 지나 집에 도착하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 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
을까? 식구들의 모든 복장이 중국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는 내가
부모님을 도와 한 몫을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담한 우리 집에 들어섰다. 영하 30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지
방이라 규모가 클 수도 없었다. 이중 창문으로 된 유리창에는 김이 서
려있고 온 집안은 따뜻했고 아늑했다. 방은 4개였고 중앙에는 페치카
가 있어 석탄을 계속 때며 24시간 항상 따뜻하게 했다. 상봉의 기쁨으
로 그 동안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새하얗게 밤을 새웠다. 마음을 털
어 놓고 말할 수 있는 온정과 기쁨이 객지에서 오랫동안 쓸쓸히 지내
온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어머니를 빼고는 모두 남자들인 우리 식구들
을 바라보니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사셨을까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풍부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한국에 있을 때에 비하면 모든 면에 있어서
넉넉하였다. 우선 식사만 해도 쌀밥을 먹을 수 있었고 가사에 사용되
는 소모품들도 옹색하지 않았다. 동생들의 교육문제도 여러 모로 고려
되어 있었다. 두 동생은 그 곳에서 가장 이름있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
었기에 그것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독채라지만 여러 세대가 모여살 수 있도록 칸막이로 되
어 있었다. 오늘의 콘도미니엄 같은 형태였는데 사람이 다니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서로 마주보며 여러 채의 집이 있었다 전면에 큰 대문이
있고 사람이 다니는 중간 샛문이 있었다. 한국 사람이 4~5가정 살고
있었고 일본인도 두 가정 있었으며 나머지는 중국 사람들이었다. 이질
문화권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민족을 초월한
사랑의 집단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도로변에 세워진 크고 웅장한 대문
은 옛날 마적단을 방비한 문이 아닐까 싶었다. 자기 집 앞을 깨끗이 쓸
며 공동으로 사용하는 마당을 두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속에서 뿌리를 내려가며 살리라고 몇번
이고 다짐하였다. 우리 집은 주님을 모시고 밤마다 가정 제단을 쌓고
말씀을 중심으로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주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
과 평안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었다.
    나는 거리를 구경하러 나갔다. 고층건물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건물은 도키와 마루쇼라는 대표적인 일본인 백화점이었다. 거리는
아스팔트로 단장되어 대도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군데군데 사람
들이 줄을 지어 있기에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전시중이라 생필품이 부
족한 때라,여러 가지 배급을타기 위해서였다. 신사복을 입은 깨끗한
옷차림의 일본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 도시의 중심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살고 있었으며, 문화 시설
도 갖추어져 있었다. 중국인들은 변두리에서 만주족과 함께 집단을 이
루어 살고 있었다. 교통수단은 말을 많이 이용하기에 길이 깨끗하지는
않았다. 마차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이었다. 길거리에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장사가 많아서 아무 곳에서나 서서 사먹고 버리니 지저분할 수
밖에 없었다. 건물도 낡아 보였다.
    백계 러시아 사람들은 기다아스카이어를 중심으로 하여 대부분이
남녀 양복점을 경영하는상인들이고 혁명 당시 소련에서 망명온 귀족
과 자본주의자들이었다. 그밖에도 몽골 족이 있었으며 일본인은 일등
국민을 자처하여 백화점만을 이용하였는데 그들의 자부심은 외부로도
나타나 보였으며 전승국가의 기세가 당당하였다. 어느 국민이나 안정
된 국가가 있어야 어느 곳에 가도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뼈저리
게 느낄 수 있었다.

    사회의 첫걸음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여러 형태의 시민들의 표정을 열
심히 살폈다. 그 중의 일원이 되어 나 역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외국생활의 첫 걸음은 중국사람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변두리
우체국에서 시작되었다. 관공서인 까닭에 모든 서류는 일본어와 중국
어로 처리되었다. 나는 일본어 공문을 담당했다. 한문을 이해할 수 있
었기 때문에 중국어 공문도 차츰 차츰 익힐 수 있었고 친구도 사귀어
별 불편없이 직장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하얼빈에서 뿌
리를 내리는 데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조선에 있을 때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황국신민으로서 신
사 참배의 우상 숭배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주에 온 이후로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폭풍과 같은 핍박이 사라
지고 그 연단의 과정을 이기고 구세주를 바라보는 차원 높은 신앙을
소유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일인지 ! 소나기가 퍼붓고 나면 햇빛이 눈부
시게 쏟아지듯 시험의 관문을 잘 통과해야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
광이 있다는 산 경험이었다.
    주일 저녁이면 교회에서 중국어 성경 공부를 했다. 교회는 집과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남보다더 일찍 가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중국어를 배웠다. 예
배가 끝나고 집에 혼자 돌아을 때는 위험한 까닭에 아버지가 늘 동행
해 주셨다. 오랫만에 아버지는 성숙해진 딸과 함께 신앙에 대한 토론
이나 가정에 대한 진로도 의논하면서 대견해 하셨다. 고향에서처럼 어
른들의 간섭이 없이 북만주 대륙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니 또한 기
쁨이 충만했다. 부녀간의 대화는 날로 무게를 더해 갔고 국가와사상
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어서 가슴은 마냥 부풀기만 했다. 안정되고
귀한 시간들이었다. 우리 가정에 또 하나의 경사가 생겼다. 어머니가
막내동생을 낳았다. 남자가 많은 집안이지만 남동생 재륭이를 낳았을
때도 온 식구는 기뻐했다. 식구가 늘어날수록 북만주에서의 뿌리는 더
깊게 내려지고 있었다.
    큰 동생은 대학입시 준비를 하게 되었고,둘째 동생은 일본인 고등
학교를 다녔고, 셋째 동생은 조선민족이 운영하는 유일한 금강초등학
교 학생이 되었다. 그 외 친척들도 만주로 이주해 오게 되었고 외할머
니도 모셔왔다.
    우리는 영육간의 큰 축복 중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교 교사로

    그후 우체국을 그만두고 금강초등학교 교사로 전직하였다. 하얼빈
에 와서 내 민족 내 동포 어린이를 교육시키게 되자 조선민족으로 긍
지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보람을 느꼈다. 아버지나 어머니와 동생들까
지도 찬사와 격려를 해주었다. 그후 대동아전쟁 즉 미일전쟁이 일어났
다. 여학교 때처럼 전송 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어쩐지 상황이 급박하
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병역 의무에 해당된 남자에겐 신고하라는 시
달이 왔다. 나의 큰 동생 황재열은 병역 해당자로 신고를 해야 했다.
당국에서는 간섭이 점점 심해졌다.
    병역 해당자는 그 대우가 일본인과 같았다. 쌀과 설탕, 기름 등을 주
면서 차별없이 대우하며 대학입시 자격도 갖추게 하니 부득이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조선인에게 주는 배급은 잡곡인 보리쌀, 좁쌀이 더 많았고
그 외의 배급도 일본인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 조선사람에게 그 다음이
중국 본토인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었다. 중국 사람은 거의 찌꺼기뿐이
니 그들의 불평은 대단히 컸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보다 지방이 더욱
심했고 조선족이나 만주족은 허리를 더 졸라매야 했다. 모든 물자는
통제품이었고 큰 백화점에서는 일본 사람 아니 일본말에 능통한 사람
만 살 수 있는 제도로 바뀌었다. 나는 일본의 종말이 가까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불안과 초조한 마음이 엄습해 왔다.
     아버지께서 먼저 고향으로 다니러 나가셨다. 우리 가정은 북만주에
서 더 살 수 없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금강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린이들과 지내는 시간
이 무척 즐겁고도 보람되었다. 하얼빈의 조선족은 비교적 자유로이 우
리 말을 쓸 수 있었고 학과목은 주로 일본어 책을 사용했다.
     하루는 수업을 마친 오후에 전례대로 라디오 뉴스를 통해 전승결과
를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 일본국이 항복하는 보도가 울려
나왔다. 깜짝 놀란 직원들은 귀를 기울였다. 평소에 나와 친근하게 지
내던 일본인 와다 선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위로해 주기에
앞서 해방의 기쁨으로 벅차 있었다.
    8.15 해방이 되었다. 나는 기쁘면서도 당황했다. 외국에 사는 사람
들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면서 앞날의 설계를 해야만 했다.
하얼빈 땅은 하루아침에 질서가 뒤흔들렸다. 중국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일본인 사업체나 건물에 들어가서 있는데로 빼앗는 것이었다. 길거리
에 잘못 나갔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매맞아 죽는 사
람도 있었을 정도였다. 물건을 빼앗긴 일본 사람은 목숨만 살려 달라
고 애원하며 정처없이 몸만 피신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당당하던 일본인들이 이제는 "목숨만 목숨
만‥‥‥ 하고 있었다. 성난 호랑이와 같은 중국 사람들은 조선족은 건드
리지 않았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중국 사람들과는 서로의 슬픔
을 하소연하면서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도 주권을 빼앗기고 우리도
나라를 빼앗긴 설움 때문이었다.
   며칠 후 거리에 수만 명의 소련군이 탱크를 몰고 입성하였다. 내가
놀란 것은 북만주에 와있던 백계 러시아인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들
은 자기의 동족인데도 반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
들은 또 어디로 피신을 가야 하느냐고 한탄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딱
한 실정이었다.
    한편 우리 가정은 하얼빈에 뿌리 내린 지 7년 만에 다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정든 하얼빈을 떠나야만 했다. 주던 배급도 이제는 그치
고 말았다. 다행히 금강초등학교에 봉직했던 관계로 학교에 남아있는
약간의 쌀을 탈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귀국준비를 서둘렀다.
    집안의 모든 가산을 남겨 놓고 식량과 입을 옷 몇 벌씩만 싸가지고
떠나기로 했다. 우선 교회로 가서 동포들의 동태를 파악해야 하기 때
문에 대담하게 나 혼자서 교회를 찾아갔다. 길거리에 나서니 소련군이
따발총을 거꾸로 메고 아무 것이나 강탈하며 젊은 여자를 찾고 있었
다. 살기가 등등한 거리를 지나 교회에 도착했을 때 모든 신자들이 어
떻게 왔느냐고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죽을 힘을 다해 찾아갔으나 교회에 있는 교인들도 제 살 길을 정하
지 못하고 있으니 의논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도를 드
린 후 교회문을 나왔다. 길을 한참 걷는데 소련군인이 총을 나의 가슴
에 들이대고 위헙을 가해왔다. 그때 내 뒤에서 오던 교회 청년이 무엇
이라 말하니 내게 총을 겨누고 있던 소련군 졸병은 달아나버렸다. 그
청년이 나를 우리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고마운 청년이었다. 나는
집에 들어와 안도의 숨을 쉬었으며 곧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우리 집 안에서 또 한 번의 비상사태가 일어났다. 젊은 일본
여자를 노린 소련군인이 기습을해온 것이다. 그 집 안에 있었던 사람
들은 숨을 죽이고 몇 시간 동안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나는 두 번의 고
비를 잘 넘겼다. 나는 생각했다. "가자! 내 조국으로!"

귀국열차

     "고국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마음먹고 우리 가족은 떠날 준비를
하면서 외부로는 동포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수소문하던 중 좋은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마침 어떤 동포가 공산주의 선전을 위한 귀
국단체를 조직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귀국단체에서는 당국과 교섭을 펴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재빨리
돈을 만들어 단체에 가입하였다. 단체에 가입하고 2주일 후 모집 인원
300여 명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귀국열차가 준비된 하얼빈역으
로 집결하였다. 사실 귀국열차는 모험적이었다. 무조건 떠나야겠다는
사람들의 소망이었을 뿐 우리 가족은 기도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설움을 받고 있었다. 이럴 때 내 나라가 있었다면
우리 정부가 우리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겠는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서 그것도 제 땅이 아닌 외국에서 설움을 당하고서야 민족과 조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꼈다.
    이 고난을 나의 힘으로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련 군인만
보면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모두 그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겨우 고국으로 돌아가는 귀국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는 먼저
떠나셨고 어머니를 위시한 전 가족 여섯 식구가 모두 같이 떠났다.
기적소리를 울리며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다시 하나님께 드렸다. 기차는 달려가지만 그야말로 완행열차
였다. '이젠,달리는구나' 하고 보면 또 섰다. 이렇게 하여 무더운 태양
과 싸워가면서 신경(지금은 장춘), 봉천(지금은 심양), 안동(지금은 단
동)을 통과하여 나의 조국 신의주 땅에 도착하였다. 한 역에서 하루씩
이나 머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걸어서 갈 수도 없는 일이니 기다리며
참았다.
     역에는 사서 먹을 음식도 없었다. 자기의 냄비를 가지고 역 플랫폼
에서 밥을 지어 먹으면서 만주 땅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세수도 목
욕도 못하고 긴 날들을 보냈으니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은 거
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준비한 돈과 보석들이 없어져갔다. 기차가 정
지할 때마다 소련군인들이 기차 안에 들어와서 검문검색을 했다. 이
로스키들은 주로 여자를 요구하는 무법천지의 졸병들이기 때문에 나
는 의자 밑에 숨어서 가는 때가 많았다.
    찌는 듯한 더위에 땀냄새와 싸워가면서 봉변을 면하고자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신의주에 도착했을 때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제는
살았구나! 공산군인, 소련군인을 안 보니 살게 되었구나' 했지만 그 생
각도 잠시 뿐어었다.
    공산군과 소련군인은 신의주에서도 여전히 우리 일행을 괴롭혔다.
우리 일행은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왔고 다시 황해도 해주에 이르게 되
었다. 초가을 하늘 위에는 잔잔한 구름이 깔려 있어 조국의 가을 정취
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기차는 해주에서 더 가지 못해 일행은 기차에서 내려서 걷지 않으
면 안 되었다.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 남쪽을 향해 걸었다. 우리 식구들
은 남으로 남으로 계속 걸어가기만 했다. 몹시 지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달구지 하나를 빌려 일행 중 노약자들을 태우고 남쪽을 향해 가
야만 했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달구지에 간신히
끼워탔다. 달구지가 강을 건너가게 되었다. 제법 수심이 깊었다. 나는
밑에서 새어 들어온 물 때문에 전신이 젖고 말았다. 초가을의 밤공기
는 차가워서 겨울을 연상케 하였다. 내 몸은 꽁꽁 얼어붙어서 심장이
마비될 것 같았다. 더 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우리 일행은 길거리에서 떨어진 외딴 집에서 몸을 녹이고 그 다음
날 다시 남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어머니는 동생을 등에 업고
또 짐을 지고 안간힘을 다해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가족들과 일행들에
게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참으로 강하고 담대했다
    하루 해를 지나 초저녁에 우리 일행은 임진강에 도착했다. 안내자
의 말이 오늘 밤 달이 지기 전에 이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만약 건
너지 못하면 대낮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낮에 가다가는 붙들
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을 살펴보았다. 그곳에 철로가 있었는데 그 철로 밑에는
강물이 흘러 가고 있었다. 조심성 있게 걸음을 떼어 놓아야지 실수를
하는 날에는 밑으로 떨어져서 물 속에 빠져 죽게 될지도 몰랐다.
    우리 일행은 한사람의 실수도 없었다 최악의 사태에서 승리한 것
이었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염려하면서 강변을 탈출했다. 다시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하였다. 서울역에 도착한 일행은 안내원에 의하여
역 앞에 마련된 수용소에 들어갔다.
    그 수용소는 큰 건물이었는데 수백 명의 피난민을 수용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단체에서 벗어나 다시 고향 땅으로 내려갔다. 기다리던
고향 예천읍이었다. 고향에 도착하니 동네사람, 친지들이 환영해 주었
다. 나는 고향이 있는 것이 무한히 기뻤다. 그러나그 기쁨도 며칠 가
지 않았다
    나는 생활전선을 향해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다. 다만 조국
의 해방이 있기에 기쁠 따름이었지 고생과 수고는 떠나지 않았다. 인
생길 가는 몸이 이처럼 험할 수 있으랴!그래도 고향은 내 고향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우선 예수를
자유로이 믿게 되었다. 그러나 고생은 그때부터였다. 나는 곰곰이 장
레 일을 설계해 나아갔다. 나중에 알아보니 북만주에서 고향까지 걸어
서 문전걸식을 하며 2개월 이상 걸려서 도착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탄 귀국열차는 그 이후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제 2.부 한국을 떠나다.

병으로 쓰러지고

    고향에 돌아온 나는 다시 직업전선에 몸을 담아야 했다. 감사하게
도 내가 졸업한 예천읍 서부초등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게 되었다. 피
난민인 우리 집은 아무런 대책도 없었기에 나의 힘이 필요했다. 일제
에.시달리다가 해방이 되어 우리 말과 글을 되찾았으니 이제는 우리
말을 가르쳐야 할 판이었다. 나는 힘있게 일어서서 정신력으로 버티었
다. 어머니의 교육열이 나를 여학교까지 졸업시켰고 그 열매로 우선
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핍박 속에서도 지켜오던 본 교
회에 나가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주님이 나의 최
대의 배경' 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다. 가사에서부터 동생들 학비
까지 감당하게 되자 모든 친척들은 나를 두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피난시절에 민심이 사나운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흉년까지
겹쳤다. 형제도 친척도 모른 체 할 정도로 인심이 극에 달했다. 나는
영양실조에 무리한 탓인지 그만 병석에 눕고 말았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나는 병이 점점 악화되어 3개월이 지나도록 차도없이 사경을
해매게 되었다. 내 나이 22세. 한창 나이에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고 말
할 수 없이 슬펐다. 나는 고난의 슬픈 자리에서 주님께 기도했다.

그 순간 내 자신을 보니 두 줄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걷잡
지 못할 만큼 많은 눈물이 자꾸자꾸 흘렀다.
    침착하고 냉정한 어머니는 결코 흐트러진 모습으로 자녀들이 혼란
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셨다. 어머니는 밤이면 교회에 가서 깊은 기
도에 잠기셨다. 그때 집안에서는 돌풍처럼 핍박이 다시 일었다.
     "아편쟁이 예수쟁이다" "예수에 미쳤다" 하며 딸을 시집도 못보내
고 처녀로 죽으면 처녀귀신이 되니 집안 망친다고 화살이 빗발치듯 했
다. 아픈 사람 두고 치료보다 기도만 한다는 비난이었다. 잔잔한 호수
에 돌을 던진 격이었다. 병은 악화되어 몸은 점점 쇠약해가고 있었다.
학교에서나 동네에서 모두 내가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경
을 헤매고 있는 나는 어머니에 대한 모든 핍박과 조롱이 들리지도 않
았으며 짐작으로도 알 수 없었다.
    밤마다 새벽마다 눈물과 정성어린 기도로 그리고 지혜로운 모정으
로 살피는 어머니 ! 어머니란 그렇게도 희생적이고 아름답고 영원한 것
이었고 오래오래 내 마음 깊이 파문을 남겼다. 옆에서 안타까움으로
지켜보던 아버지도 급기야는 당신이 직접 간호하겠다고 나서셨다. 사
랑어린 눈빛으로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묵묵히 나를 간호하시는 아버
지께 한없는 사랑과 정을 느꼈다.

소생의 그날

    나는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꼭 살아서
남은 생애를 힘껏 살아 갈 것이다' 라고 몇번이고 다짐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세요. 한평생 주를 위해 살아 가겠습니다. " 누워있는 나는
하나님께 약속하고 기도를 계속했다. 회한으로 뒤척이며 잠 못들고 초
침소리 헤아리던 슬프고 괴로운 긴 밤들, 나는 주의 음성을 기다리며
울며 기도했다.
    교회에서 철야기도 하고 돌아오신 어머니께서, "너는죽지 않는다. "
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응답을
받으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환상 중에 본 십자가를 굳게 믿고 의심치
않았다. 나는 나의 생애를 주님께 맡기기로 작정한 후로 평안한 마음
을 가질 수 있었다. 진정 휴식하듯 아주 평온한 사랑의 마음이 되었다.
그 동안은 죽음에 대한 심각한 문제만이 내 가슴에 가득 했었는데 그
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로 마음 먹었다. 흘가분한 기분으로 신음도 없이 병석에서 마음을 정
리하며 누워 있었다. 마음은 맑고 깨끗해져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었
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내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지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이별하는 것이 슬퍼서 우는 것이리라. 그러나
내 마음은 슬프지 않았고 하나님이 일으켜 주시고 당신의 일꾼으로 쓰실
것이라는 확신이 왔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 나의 사명을 깨닫고 더 열심히 주님께 매달렸
다. 어머니가 예수 믿어 집안을 망치고 딸을 병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핍박속에서 나의 병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폭풍뒤의 정적과 승리
의 기쁨이 영혼 깊숙이 넘쳐 흘렀다. 주님으로 더불어 승리하게 된
것이다. 차차 병이 회복됨에 따라 다시 나는 학교에 복직하게 되었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병이 회복되면서부터 나는 새벽마다 교
회에 나가서 나의 기도의 제목인 예수를 위해 사는 인간이 되기 위해
서원하였다.
    "평생 주를 일해 바칠 수 있는 일을 주시옵소서." 나는 새로운 삶을
찾아야 했다. 소생했기에 주를 위한 생활이 내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 기도하며 응답을 바랐다. 나의 건강을 위해 심부름하는 사람도 두
고 조용히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어머니는 서울로 아들을 찾아 올라
가서 신학교 기숙사에서 여러 신학생들을 돕는 일을 하셨다. 신앙의
재정리를 위해 그리고 학생들을 위해 주방에서 취사를 담당하시며 조
용히 지내고 계셨다. 3~4개월 후에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셨다. 무서
운 바람은 자고 칠흑 같이 어두운 밤하늘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별이 총
총히 반짝이고 있었다.

고학생에게

    그후 어머니는 자주 서울을 왕래하셨다. 아들에게 빨래나 음식도
전해 주며 장사도 하셨다. 하루는 기숙사에서 동생과 같이 방을쓰는
청년이 있는데 신앙도 좋고 장래성도 있어 보이더라고 은근히 칭찬하
셨다. 나는 나의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이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각하
며 그저 듣고 흘려 버렸다. 하루는 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경제적으
로 곤란하여 겨울방학 동안 돈을 벌어 보겠다고 하면서 장사 밑천을
융통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러한 동생이 기특하고 미더워서 곧 돈을 보내 주었다. 동생
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모르고 귀공자로 자랐고 내가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학비를 대주어 옹색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고 은혜를 받아 신학교에 갈 결심을 한 것이
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고학을 해서라도 신학공부를 하려는 동생의
모습에 어머니도 나도 감동되었다. 추운 겨울에 기숙사에서 자취를 하
며 길거리에 나가서 잡화상을 시작했다. 젊어서 고생 경험을 쌓기 위
함이라고 하며 기꺼이 힘들게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동생은 한방의 룸메이트 신학생을 친형님처럼 따르며 친하게 지내
는 사이였다 추울 때 서로 얼었던 손을 녹여 주며 등을 맞대고 고락을
같이 하면서 네 것 내 것 없이 서로 뜻을 함께하였다.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에 두 사람은 그동안의 피로도 풀겸 집으로 왔다. 고생하면서 ·꽁
부하는 것이 귀하게 생각되어 정성스레 대접하였다. 일주일을 푹 쉬었
다.
    동생은 나를 찾아와서 그 형님에 대해 이야기하며 좋은 분이라며
결혼을 넌지시 권하였다. 나는 이미 내 계획이 서 있었기에 웃음으로
흘리려 했다. 그러나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신앙을 지키며 주의 일을
하고자 공부하고 있는 그의 눈빛에는 강한 의지가 넘치고 있었다. 결
혼을 하면 목사의 아내가 되겠지, 목사가 되면 일생 주의 일을 하리라.
나는 결혼 그 자체보다도 주님의 일을 같이 할수 있다는 데 다소 마
음이 끌렸다. '주여! 저는 무능합니다. 재능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기
대하는 만큼 큰 일꾼이 될 수도 없습니다. " 하고 고민했다. 나는 어머
니가 그분과 나를 짝 지어 주시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 혼자 주의 일
을 하는 것보다 둘이서 같이 나누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라는 주위의
충고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학생이었다. 동생들의 교육비도 감당해
야 하는데 그의 뒷바라지를 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이 들자 마음을 돌렸다.
    어머니는 계속 나에게 권하셨다. '믿음이란 모험이 아닌가,젊으니
고생하면서 기독교의 진가를 맛 볼 수 있지 않은가! 어떠한 고생이라
도 견딜 수 있으므로 고학생이라도 결혼할 수 있으리라.' 며칠을 기도
하고 생각하면서 용단을 내었다. 지금의 이 고생이 밑거름이 될 것이
라고 밀었다. 그 학생이 오늘의 나의 남편이 된 임동선 목사이다. 이렇
게 내가 망설일 때 어머니는 고생의 길을 택해주셨다.
    다른 혼처도 있었다. 학식이나 기반이 잡힌 가정도 있었지만 어머
니의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육체적으로 부유한 삶보다도 오늘은 고생
을 하지만 내일의 꿈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현실의 고통을 참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
라 그것은 또한 나의 심정이었다. 일단 마음을 정하니 소녀시절에 가
졌던 꿈이나 이상은 물러가고 현실의 보람으로 벅차기만 했다.
    "하나님 나를 인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나를 이렇게 인도하
시려고 무서운 병 가운데서 살려 주셨나 생각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
다. 신앙적으로 원숙한 사고를 주신 것 같았다. 나는 미약하므로 결혼
해서 남편과 같이 주의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나는 다시 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에게서 큰
집으로 오라는 통지가 왔다. 짐작이 갔다. 아버지는 말문을 여셨다.
    아버지는 나의 결혼 상대에 대해 반대하셨던 것이다. 사실 무리는 아
니었다. 아버지로서는 고학생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결혼이란 신랑의
가정이나 혈통을 알아본 후에 결정하지 타지방에서 동생의 친구로 놀
러온 사람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결정짓는다 싶으셨는지 반대하셨다.
    과연 옳은 말씀이었다. 아버지의 뜻에 동의하면 어머니에 대한
핍박이 있을 것 같아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아버지 ! 저는 각오하고 결혼할 겁니다. 만약에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저는 부모남께 원망이나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담하
게 대답했다.
    나는 "둘이서 힘을 합하여 개척해 나가겠습니다. 아버지 염려마십
시오." 하고 일어섰다. 아버지는 성격이 온유하시며 조용하셔서 그대
로 허락해 주셨다. 아버지는 고생스럽게 걸어온 딸의 길을 가엾어 하
시면서 안쓰러운 생각으로 종더 편한 가정으로 시집보내고 싶은 마음
이 계셨으리라.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감사함이 우러나왔다. 나로 인해
어머니가핍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다해서 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말씀 드렸던 것이다. 어머니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고 젊
은 세월을 배척의 소굴에서 오늘날까지 걸어 왔는데 나도 이제 한 여
성으로서 내 길을 걸어가야 하니 내가 택한 신앙의 길이 천만다행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에 용기를 가지게 되었
다. "오! 하나님 강하게 나에게 역사하옵소서 !" 하나님을 믿는 길에 환
난이나 핍박이 있을지라도 이겨나가는 신앙심이 있어야 한다.
    신앙자는 투쟁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며 투쟁할 때 행동이 따른
다. 믿음은 강할 때 승리를 가져온다 어머니는 내가 지닌 힘 이상의
힘을 언제나 불어 넣어 주졌다.


결   혼

    약혼한 지 일 년만에 어머니의 주선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시골학교 교사의 위신에 손상되지 않도록 식이 올려졌다. 나는 그 동
안 키워온 믿음으로 육신의 안목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친척들의 이목에 신경을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기른 딸인데 돈 한 푼 없는 고학생에게 시집
을 보낸단 말인가' 하니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기보다는 욕이 되지 않
을까 싶었다. 걱정이 태산같았다.
    1948년 1월 9일,드디어 나의 결혼식 날이었다.
    신랑은 강원도 지방전도여행을 다니다가 친구 한 분과 같이 테백산
을 넘어 우리 집에 찾아왔다. 그 모습은 남루함 그대로였다. 신발은 군
화였으며 행랑짐 하나를 둘러메고 찾아든 것이었다. 시골 전도란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니 특별한 사명자가 아니면 하기 힘든 전도여행
이었다. 사도 바울도 짝을 지어 바나바와 같이 다녔기에 그이도 또한
친구와 같이 다녔던 것이다.
    친구와 같이 지방전도를 하다가 결혼식을 위해서 태백산을 걸어서
넘어 온 것이었다. 이미 신랑이 오기 전에 서울에서는 전보 한 장이 날아
왔다. 그의 형님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신부의
면사포와 반지를 가지고 오시겠다던 형님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기에
올 수 없다는 통고였다. 그러나 결혼식을 연기할 수도 없었다. 큰아버
지와 할아버지,아버지 등이 조롱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상황에서 면사포가 없으면 어떠하며 반지가 없으면 어떠하랴
만은 어른들과 친척, 동네 사람들에게 체면이 서지 못할까 두려웠다.
마침 교회 교인 가운데 금은방을 하는 분이 있었다. 우선 반지 하나를
가져왔다. 동생이 40리 길이나 되는 곳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면사포
도 빌려왔다. 깨끗하고 산뜻하지는 않았으나 그런대로 쓸 수 있었다.
    예천교회 담임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이 올려졌다. 그리스도 안에
서 평화스럽고 단촐한 결혼식이었다. 노처녀가 시집가는 기쁨보다는
그 뒤의 일 즉 집안 어른들과 친척들의 핍박이나 없을까 하여 조바심
과 걱정이 더 컸다.
    결혼식이 끝난 이튿날 빌려온 반지를 금은방으로 다시 보냈다. 이
유는 잘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결혼한 신부는 초등학교로
신랑은 서울 아현동에 있는 서울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 기숙사로
각각 헤어졌다. 신랑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편지를 써서 보내왔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주하게 날아오는 편지
내용이란 주로 설교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예천에 두고 온 나는 당신만 생
각합니다. 곧 당신을 서울로 모셔 오겠습니다. 그리고 스위트홈을 차
리겠습니다. " 최소한도 이런 내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사랑이란
말도 없이 보내온 편지는 설교나 논문과도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혁명적 편지가 왔다.
    '여보! 나는 기도하면서 생각해 봤는데 당신이 서울에 와서 같이 신
학공부를 하여 장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의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
    시집간 신부가 신랑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당시의 우
리 형편은 매우 곤란하였다. 내가 학교에 머물러 있어야 동생들의 학
비도 보탤 수 있고 살림도 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현실에 계속 매여서 살 수만은 없었다. 어떤 변화에도
용기는 필요하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남편의 의견에 찬성하여 시험을
준비했다. 내가 다시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현실이었다. 그
러나 하나님께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했고 주님의 일꾼이 되게 해달라
고 하면서 기도하였으니 이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서울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공부를 해야 주의 일꾼이 될 것이었다. 용단을 내리고
서울로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신학생 시절

    신학교 입학허가를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순종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단단히 각오를 하고 일단 결정한 신학
과정을 공부하리라 마음을 굳혔다. 둘이서 같이 공부한다는 건 너무
무리였다. 우리는 매사를 주님께 맡기자고 약속하며 모든 체면도 내어
던지고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자립한다는 철저한 정신으로 지게 품팔
이로 나섰다. 건장한 남편의 체격이었지만 굶지 않을 만큼의 배고픔을
참으며 지게품팔이를 하기에는 힘든 노동이었다. 시골에서 때때로 어
머니께서 얼마의 식량을 보내 주셨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때로는 굶어
야 할 때도 많았다. 밥 한 그릇이 절실할 때였다. 그때마다 그리스도의
군병되는 훈련기간으로 알고 불평없이 견딜 수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나는 웬만한 길은 걸어서 다녔다. 교통비를 절약하기 위해
서였는데 굶어가며 공부하는 남편이 요기를 할 수 있는 떡이라도 사들
고 돌아오는 길이라면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한 됫박의 쌀을 아껴가며 연명할때도 목적이 있었기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참을 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으로 학교에서 남편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서울신학교 옆에 있는 아현성결교회에서 학생집회를
요청받게 되었다. 그 집회를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남편은 아현성결
  교회 학생부를 지도하게 되었다. 그후로 공부에 전념하며 밤이면 서울시
  내 교회의 부흥회를 찾아다니며 은혜를 받았다. 남편은 계속하여 설교
  청탁을 받았고 나는 그때마다 같이 다녔으며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목
사가 되도록 여러모로 최선을 다했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맞추어 일일이 평가도 했고 말하는 어
조나 태도 내용 등을 메모해 두었다가 조언했다. 나는 장로교인이었기
에 성결교 신학교인 서울신학교에서 배움의 차이점을 연구하기도 하
고 좀더 폭넓게 초교파적인 면에서 일해보려고 다짐했었다. 이 정열을
나 자신에게 기울였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여종이 되었을 것을 하고
한탄도 해보았다.
     나는 임신을했다. 심한 입덧으로 인하여 몸이 수척해 있었다. 그때
남편은 이미 경기도 여주읍교회를 담임하고 있었기에 서울을 떠나 있
었던 터였다. 그래도 나는 신학교만은 열심히 다녔다. 날이갈수록 불
러오는 배 때문에 숨이 차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목적을 향하여 돌진하
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노력에 노력을 더해갔다. 남편없이 혼자 남아
있던 신학교는 더욱 쓸쓸했다. 급강하된 추위 속에서 견디어야 하는
겨울은 지루하고 길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난 여주로 내려갔다.
여주에서 아들을 순산하는 경사를 맞았다. 신학교가 개학하자 나는 갓
난아이를 안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아이를 안고 신학교에서 공부하
는 내 모습은 한편으로 우습기도 하고 내 열심에 신학생은 물론 교수
들까지 감탄했다. 어느 때는 그네에 아이를 올려놓고 마지막 남은 시
험공부를 위해 밤을 새웠다. 아이를 업고 공부하던 신학생이 드디어
졸없하게 되었다.
    1950년 5월 15일,서울신학교 졸업장을 받고 감격에 젖었다. 겨울
이 가고 봄이 오듯 이제 우리 생의 나무에도 가지가 무성케 되었고
나의 열매가 달리는 듯 싶었다. 오월의 무지개, 그 무지개를 보았다. 눈
물을 머금은 눈빛처럼 영롱한 채색,그 빛은 습기 없이는 퍼오르지 않
는다. 눈물 뒤에 오는 빛과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했다. 남편의 첫 목회
지인 경기도 여주읍교회로 내려가는 내 가슴은 한 가지를 이루어 내었
다는 성취감에 마냥 행복했다.

여주 개척교회

    경기도 여주읍에 있던 교회가 일제하에서 그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민심은 술렁였고 재건할 능력조
차 없어 닫힌 문을 좀처럼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아현성결교회 이
성구 장로님이 고향인 여주읍에 건물을 마련하여 교회의 문을 열게 되
었다. 흩어진 신자를 모으니 약 20명이었는데 집사 두 가정을 주축으
로 개척하게 되었다. 이때 임동선 전도사가 부임한 것이다. 우선 기도
하면서 하나님께 앞으로의 길을 부탁하며 마음을 굳혔다. 교회는 말씀
중심에 서서 인도하는 임 전도사의 정열에 청년들이 합세하여 점점 부
흥 발전되어 갔다. 교회는 한식 구옥이었는데 기역자(ㄱ) 집으로 한 쪽
은 세를 놓고 한 쪽은 교회 집회장소로 사용했다. 20여 명의 신자의 헌
금으로는 등불을 켤 석유값 정도가 충당되었다. 우리 내외는 열심히
전도하며 흩어진 양떼를 모아 신앙으로 인도했다.
    주일이면 양떼들은 말씀으로 교훈을 삼고 새롭게 주님을 모시고 단
장하여 놀랍도록 성장해갔다. 점점 부흥일로로 매주일 교인이 증가되
어 3개월만에 3백 명이 넘었다. 교회는 조금씩 수리를 시작했다. 가마
니 바닥을 의자로 바꾸고 중앙에 강대상도 놓았다. 풍금도 구입했으며
교회의 용모가 갖추어졌다. 맞은 편 건물에 주택을 꾸미고 부엌살림도
갖추었으며 장독대도 만들었다. 여주에서 5일 만에 열리는 장날마다
땔감도 사들였다. 교회가 점점 부흥되면서 병자들이 모여들었다. 사귀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임동선 전도사가 신자들과 뜻을 같이 하여 기
도할 때 많은 병자가 일어났다. 거품을 뿜고 발광하는 병자도 며칠 만
이면 온순하고 바른사람이 됐다. 교회 안은 병자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때 인근 주변에 있는 신자,불신자를 막론하고 병자들이 교회로 몰
려왔다.
     마치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의 불길이 타올랐다. 주일이면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성경이야기 등으로 옥토와도 같은 마음밭에 씨를 뿌리
니 어린이가 몰려들어 교회 안에 가득하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처남
황재열 전도사도 방학 동안 와서 같이 봉사하게 되어서 큰 부흥을 일
으켰다.
    그때 나는 임신 중으로 누워있었는데 신자들이 자진해서 사택의 살
림을 살펴주며 봉사하였다. 그리스도 사랑의 귀함을 느꼈다. 아침 새
벽기도회에 올 때에 여러 가지 반찬과 자기들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음
식을 사택 마루에 갖다놓고 갔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아침마다 만
나로 먹이시던 역사와도 같이 따뜻한 국과 찌개 등 재미 있게 가지가지
로 먹여주실 때 깊은 사랑을 느꼈다. 사람이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며 참새도 먹이신다는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때 시아버
님께서 와 계셨다. 아버님 수종을 신자들이 들어주며 의복 시중까지
들어주셨으며 나에게도 정성들여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니 나는 감
격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른 봄 추운 때인데 해산의 됫바라지
에 서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온 교인이 함께 기뻐하며 수고하였다.
내가 신학공부를 마저 마치기 위해 서울로 갔을 때는 서울까지 따라와
보살펴 줄 정도로 내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어 주
었다. 매일 수업 후 쉬는 시간에는 아이를 신학교까지 데리고 와서 젖
을 먹일 수 있게도 해주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졸업을 할 수 있
었다. 다시 아이를 데리고 여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택에서 그 동안
에 쌓였던 피곤을 풀고 있을 때 그 무서운 한국전쟁이 터졌고 갓난아
이를 안고 교인들과 함께 남으로 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한국전쟁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인 경기도 여주교회에 내려와 여독
도 풀리기 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탱크는 폭음소리를 내며 남진하고
있었다. 현대식 장비로 무장한 인민군은 38선을 돌파하고 남진을 시작
한 지 일주일도 채 못되어 서울은 물론 한강 저편 여주까지 밀고 내려
왔다. 우리는 피난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필이면 그날이 아이
의 백일날이었는데 백일 떡은 고사하고 갈아입을 옷 한 벌,아이 기저
귀와 설탕, 쌀 한 됫박 등의 피난짐을 챙겨 길을 나전다. 당시 우리 교
회는 장년이 250명 정도이고 학생이 300명이나 되었다.
    자리잡힌 대교회로 발돋움하고 있었고 종각도 훌륭하게 세워 정말
손색 없는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나와 교인들은 먼저 피난길을 떠났
지만 남편과 아직 준비하지 않은 10명의 교인들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
리고 있다가 갑자기 "꽝!" 하는 굉음과 함께 폭격을 당한 것이다. 한강
건너편에서 쏜 인민군의 박격포탄이 예배당 위쪽 뒷면에 떨어진 것이
다. 창문이 폭음과 함께 파열되고 내부의 집기도 부숴져 수라장이 되
었다. 그런 와중에도 교인들은 다치지 않았고 모두 안전하게· 우리가
먼저 피신한 곳에 도착하였다. 계속해서 따발총소리가 콩볶듯이 들려
왔다.
    그리고 아아, 그 폭탄 떨어지는 소리 ‥‥‥ 머리 위로 5백킬로그램 짜
리 화약 덩이가 떨어져 세상이 온통 쪼개지는 듯했다 간단히 식사
를 마친 후 남쪽을 향해 정처없이 걸었다. 달도 없고 구름만 잔뜩 낀
캄캄한 밤이었다. 몇 발자국 앞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서글픈 마음으
로 돌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실로 두 번째 겪
는 피난이었다.
    해방 직후 북만주 하얼빈에서 황해도 해주까지 그리고 개성까지 걸
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때는 홀몸이었고 지금은 어린 생명까지 보호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양실조로 젖이 나오지 않았다. 배가고파 우
는 아이의 울음은 밤 깊은 시간에 산울림과 같이 들렸다. 나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파오고 마음속에서는 서러운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렸
다. 아이는 빈 젖을 빨다 칭얼거리고 지쳐서 잠이 들곤 했다.
    갑자기 탱크와차량 소리가들렸다. 일행은 숨을 죽이며 높은 논둑
에 피신하여 모두가 엎드려 움직이지 못하고 동태를 파악하기에 온갖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군인지 인민군인지 어두움 때문에 파악할 수
없었다. 아들은 백일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기 때문에 업을 수도 없었
고 양 팔에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아이가 울기만 하면 우리 일행은 발각되고 말 것이 아닌가. 발
각되면 그 뒤의 일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손에서 진땀이 나고 혀가 마
르는 초조한 순간이었다. "아이야 제발 울지 말아다오. 울면 안돼." 나
는 울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물론 남편과 교우 전체가 일
심으로 기도를 했다. 거짓말 같게도 아이는 우리의 마음을 알았는지
고요히 잠을 자 주었다. 인민군의 탱크와 차량소리,그리고 군인들의
고함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너무나도 숨가쁜 순간이었다. 우리
들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토록 지루하던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염려와 걱정으로 몸은 굳어져 있었고 혀까지 얼어붙을 정도였다. 날이
  밝아 육안으로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 되자 안도의 숨이 나오고 "주님!
감사합니다. " 우리는 손을 모았다. 우리들의 눈앞에는 경찰과 국군의
모습이 보였다. 인민군으로 착각했던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다행한 일
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불안과 공포와 초조와 긴장 속에서 부활하
신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같이 우리의 얼굴에는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
다. 동행했던 교인들은 가족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우리의 대열에서 떠
났다.
     시아버님과 모두 네 식구가 아이를 번갈아 안고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남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방에만 있던 사람이라 온
밤이 고통스러워 울고 또 울며 걸었다. 퉁퉁 부은 발에서는 진물이 흘
렀다. 얼마나 눕고 싶은지 굵은 멍석 바닥에 누으면 배고픈 것을 무릅
쓰고라도 기분좋게 잠들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시도 지체할 수 없이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더구나 시아버님을 모시고 가는 형편이라 어
디를 가든지 때가 되면 식사 때문에 걱정이었다. 거지가 따로 없었다.
체면이나 창피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음식을 얻으러 어느 집이든 가
야 했다. 내가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아이는 젖을 못 먹어 기
진하여 가고 시아버님이 굻게 되고 보니 나의 가슴은 구멍이 뚫리는
듯 하여 눈물을 삼키며 찾아 다녔다. 사람들은 젊은 부인의 사정을 딱
하게 보아 후하게 대해 주었고 위로도 해주었다.
     경기도 장호원, 충북 음성, 청주를 지나 대전으로 갔다. 각 곳에서
모여든 피난민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화물차에 오른 피난민들, 언제
떠나줄지도 모르는 그 기차는 피난민의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짐을 최
한으로 줄여 먹을 양식과 이불을 올려 놓고는 덕지덕지 포개 앉았다.
기차 뚜껑(지붕)에까지 기어 오른 피난민, 모두가 살아야만 했다.
나는 이 고통의 행렬에서 어머니가 계신 고향 땅 예천을 생각해 내었
다. 대전을 떠나서 김천과 상주를 거쳐 우리 네 식구는 예천읍에 닿았
다. 피난 길을 가는 동안 곳곳마다 인민군이 뒤따라오기도 하고 아니
면 먼저 인민군이 다녀간 뒤를 찾아가는 수도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찾아간 친정은 빈집이었다. 그곳 사람들도 모두 피난을 간 것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이 벌떼를 쑤셔 놓은 듯 어수선하고 우왕좌왕 정신이 없
었다. 아이를 내려놓고 피곤에 지친 몸을 잠깐 쉴 때 평안이 정말 귀
한 것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만에 어머니는 누구에게 들
었는지 가던 길을 되돌아 헐레벌떡 달려오셨다.
    어머니와 함께 20리 밖에 있는 외갓집으로 갔다. 외갓집이 있는 중
평은 온 마을이 친척이었고 이모님이 살고 있었기에 안심이었다. 중평
에 도착하니 막내동생이 나를 보자 얼싸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그 모
습이 귀엽고 우습기도 하여 잠시나마 웃음판이 벌어졌다. 오랫만에 갖
는 휴식, 중평의 밤하늘엔 별도 참 많았다. 밤이 으슥해지기 시작하면
꼬리를 달고 별똥별이 수를 놓아 더욱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며칠
후 중평장로교회의 정 장로님이 찾아오셨다. 자신의 조카가 안동역에
근무하는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밤낮으로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었
다. 그 병은 사귀병이었다.
    남편은 여주에서도 병 고친 경험이 있었지만 그 부모의 믿음에 힘
입어 환자를 위해 기도에 들어갔다. 병자를 붙들고 온갖 힘을 다해 하
나님께 간구하였다. 악한 마귀는 그 청년의 몸에서 나가고 온전한 새
사람이 되었다.

    유엔군이 참전하자 전세는 역전되는 듯 싶었다. 미 극동 사령부 공
군은 인민군에게 기총소사와 로켓공격을 가했고 그 힘에 밀려 예천에
와 있던 인민군들이 산골짜기로 도망을 오는 것이었다. 바로 아래 동
네까지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피난하라고 부탁하였다.
나와 아이는 더 이상 빠른 걸음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기에 여러 생각
끝에 내가 제안했다. "나와 아이는 따라 갈 수 없으니 혼자 떠나십시
오. 나는 일개 부녀자니까 숨기도 좋고 시아버님은 노인이니 그들이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 혼자서 있는 힘을 다해 남쪽
으로 가세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서늘한 새벽공기가 흐
르는 눈물 위를·스쳐갔다.
    남편의 손에는 성경이 들려져 있었다. 가다가 잡혀 전도사임이 발
각되면 생명이 위험하니 성경은 놔두고 가라고 어머니와 함께 권하였
다. "아니요 성경을 가지고 가는 길에 하나님이 동행할 것이요" 성경
을 가지고'가는 것이 안전하리라는 믿음의 확신이 왔기 때문이었으리
라.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편 나는 어린 생명을 보호하느라 고생이 심했다. 몸은 쇠약해지고
아이가 젖을 아무리 빨아도 나오지 않았다. 중평에는 외삼촌과 이모님이
살고 계셨다. 아들 중에 경찰관과 국군도 있었다. 그런데 인민군이 이
마을에도 들이닥친 것이다. 인민군의 잔학함은 소름끼칠 정도였다. 공
무원이나 경찰, 군인가족이면 뒷산으로 끌고가 땅을 파게 한 후, 그 속
에 앉히고 한나절에 걸쳐 계속 기관총을 쏘아 사살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잔인한 시간들이었다. 그 바람에 이모댁은 다시 정처없이 길을
떠났다. 시아버님을 모시고 나와 아이는 외삼촌 댁에서 얼마 동안 머
물러 있었다. 모기장도 있는 깨끗한 집이었다. 모기는 지루한 더위에
더욱 영악스럽게 굴었다. 약간의 안정을 찾게 되자 길 떠난 남편이 걱
정스러웠다. 낙동강을 잘 건넜을까? 외숙모님은 매우 친절한 분이셨
다. 남편 없이 시아버님을 모시고 피난온 나를 위로하며 자상하게 보
살펴 주셨다. 나는 낮이면 개천에 나가 빨래하며 시원한 물소리를 들
었고 밤이 되면 바깥 마당에 멍석을 깔고 마른 쑥에 불을 놓아 모깃불
을 피웠다. 나는 거기서도 할 일을 찾았다. 밤이 깊도록 멍석에 모인
동네 사람들에게 성경이야기를 들려주며 전도를 하였다. 순박한 사람
들은 곧잘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며 꽁보리밥이라도 같이 나
누는 푸근한 인정이 감돌았다. 몸이 약한 내게 어머니의 주의사항은
많았으나 가족의 안전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
    한편 중평교회에서는 사귀병을 고친 큰 이적을 보고 감사해서 성미
를 매주 보내왔다. 나는 주의 종의 대우를 받으며 엘리야에게 내리시
던 까마귀의 이적을 맛보았다. 9월이 오고 있었다. 고달픈 세월속에서
도 사람들은 삶을 위해서 다시 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맑은 하늘과 지
나가는 바람에 곡식은 어김없이 쑥쑥 자라 무르익고 있었다. 전쟁의
기세는 계속 꺾어질 줄 몰랐다. 걱정은 쌓여만 갔다.
    9월 28일이었다. 가을추수가 끝나기도 전인데 온 동네가 큰 잔치 치
르듯 농악을 울리며 서울 수복을 기뻐하였다. 석 달 동안 마루 밑에서
숨어 살던 사람들도 이젠 밝은 햇빛을 보아도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남
쪽으로 떠난 남편이 살아 있는지 무엇보다 궁금하였다.
    함께 계시던 시아버지는 경기도 대부에 있는 큰댁으로 떠나셨다.
나는 아이를 업고 남편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부산으로 갔지만 거기
에 남편은 없었다. 이미 남편은 나와 아들을 찾아 예천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우리는서로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예천으로 우리 모자를 찾
아온 남편은 나와 아이를 찾지 못하고 기다리다가 목회하던 여주로 떠
났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다시 여주로 찾아갔다.
    드디어 기쁨의 상봉을 했다.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들며 그리던 얼굴
이 다가왔다. 교회의 성도들도 만났다. 우리는 성도들과 얼싸안고 울
며 웃으며 기뻐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다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간
의 고생담을 나누며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얼싸안았다.
    교회는 한국전쟁의 전화로 잿더미로 변했고 사택도 불타서 흔적조
차 볼 수 없었다. 교우들은 뭉쳐서 재기를 다짐하고 교회 건축의 꿈을
키웠다. 한 교인의 가정에서 다시 제단이 구축되었다. 전란으로 받은
가슴의 상처를 부여안고 추수감사절을 지냈다. 싸늘한 밤공기는 겨울
을 재촉하고 있었다 피난갔던 교우들도 한 가정, 두 가정 모여들었다.
흩어졌던 양들이 다 돌아온 것은 아니다. 강릉으로 떠나는 도중 예천
에 들러 편지와 여비를 전해주고 가신 큰시아주버님 임수열 전도사님
이 퇴각하던 인민군들에 의해 대관령 산 속으로 전선줄에 묶여 끌려간
후 오늘까지 소식이 없다. 그러므로 남편과의 재회의 기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격과 감사였다. 12월에 들어서면서 매서운 바람은 추
위를 몰고 왔다.



68 제2부 한국을 떠나다

    1 · 4후퇴

     우리 아이는 점점 예쁘게 자라서 재롱도 부리기 시작했다. 건강도
되찾은 9개월의 토실토실한 귀여운 아이였다. 그런데 조용해지는가 싶
었던 전쟁은 광풍으로 휜몰아쳤다. 중공군이 인해전슬로 다시 남진하
여 쳐들어 오고 있었다. 1 ·4후퇴 명령으로 다시 피난 보따리를 싸야
했다. 정말 기가 막히는 현실이었다. 이번에는 교회가 함께 피난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겨울철 피난이란 견뎌내기 힘들었다. 같이 피난
가려고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보면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이 대부
분이고 중년층만 약간 있었다. 젊은이들은 군에 나갔거나 방위병으로
끌려갔기 때문이었다.
    남쪽으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추위가 뼛속
깊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감기로 열이 대단했고 어른들은
발이 부르트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한 번씩 지나가며 폭격을 해대면
높은 건물이나 주요 시설물이 파괴되었다. 두꺼운 구름 속에서 비행기
가 낮게 떠서 폭탄을 떨어뜨리면 우리는 손가락으로 두 눈과 귀를 틀
어막고(폭탄이 터지면 귀청이 찢언지고 눈동자가 빠져나간다는 거였
다. ) 입을 벌린 채 바닥에 납짝하게 엎드려 있을 수밖이 없었다. 짐을
적게 가져오라고했는데도 많이 가져온사람이 있어 남편은 대신 짐을
져주기도 하였다. 날이 갈수륵 행렬의 진행은 느려져만 갔다. 행렬 중
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왔지만 잠시도 멈출 수는 없었다. 남편은 겸손
히 이해하며 위로하고 행렬을 지휘하면서 남진을계속했다. 단체가 한
곳에 가서 잠자리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지기 전에 동네
를 찾아야 했고 쉴곳도 마련해야 헌다. 입김이 하얗게 이는 싸늘한
겨울밤이었으나 피곤할대로 피곤한 몸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날이
밝으면 또 다시 살을 에는 바람을 뚫고 행군해야 하는 피난길이었던
것이다. 일행은 지칠대로 지쳐 가지고 나온 짐들을 하나둘씩 내버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충북 음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인민군이 지나간 후였다.
우리 일행은 적군의 진지 속을 뚫고 피난을 다닌 것이었다. 길에 널려
있는 포탄 부스러기, 수류탄 등 부서진 차량과 전차가 주인을 잃고
뒹구는 그 사이로 피난민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
를 하고 있었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도자는 외로웠으리라.자기
의 짐은 내버리고 교인들의 짐만지고 다니는 남편을 보고 고개가 저
절로 숙여졌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를 헤맬 때 얼마
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며 나는 아들을 없고서 고통의 내색을 하지 않겠
다고 결심했다. "주님! 이 어려운 때에 남편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
와주세요." 나는 말없이 순종하며 남편을 따랐다.
    우리는 어디든지 가면 예배드리는 일과 다음날의 계획을세우는 것
을 잊지 않았다. 한결같이 끝없는 기도로 서로를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은 진눈깨비를 몰고 왔다. 세상이 온통
꽁꽁 얼어붙었고 혹한 속에서 폐렴으로 죽어가는 어린아이까지 생겼
다.
    전란속에서 약을구하기 위해 부모들은 거의 미친 듯이 뛰어 다녔
지만 품속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자식의 죽음을 눈으로 보아야만 했
다. 전쟁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그 부모의 비애는우리 모두의 마음을
젖게 했다.
    "하나님 ! 저 어린 영혼을 받아주세요."
    주인 없는 산에 아이 하나를 묻고 또 걸어가다가 죽은 아이를 묻으
며 서러운 고행을 계속했다. 슬프다 못해 아예 말을 잊어버린 자식 잃
은 부모의 가슴을 달래며, 전쟁이 앗아간 생명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
하니 이 땅의 어머니들의 슬픔이 피부로 느껴졌다. 실로 잔혹한 역사
의 시련 앞에서 비통할 따름이었다.
    "주님! 이 고통을 어서 속히 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제 아들을

    사나운 바람이 살속으로 파고드는 1951년 1월에 노인들과 어린이,
부녀자와 함께 떠난 피난 길은 지난날의 피난과는 달리 열 배나 되는
어려움이 닥쳐왔다.
    기온은 급강하 하여 얼굴을 마구 할퀴는 듯 매서운 바람이었고 눈
만 빼놓고 온몸을 천으로 둘둘 말았으나 숨쉴 때마다 하얗게 서리가
끼었다. 겨울바람은 어린아이에게도 사정없이 불어닥쳤다.
    허약해진 일행에게 눈비가 내리는 빙판길은 생존을 위한 싸움터였
다. 계속 후퇴해 오는 유엔군과 국군들은 각지에서 모여드는 피난민들
과 섞여 거리는 넘치고 숨막히는 순간은 연속되었다. 먼저 점령한 피
난민 때문에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안고 남의 집 부엌에서도
자고 헛간에서도 자야 했다. 잠을 이룰 수 없는 추위에 나는 기도하면
서 흐느꼈다.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은 고문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얼어서 뻣뻣해진 아이의 몸을 녹여주고 따뜻한 국물이라도 얻어 먹이
기에 정신이 없었다.
   9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들 승광이는 집 떠나을 때부터 감기에 걸려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열이 오르고 숨쉴 때마다 쌕쌕하는 소리가 들렸
다 어느 한 동네에 도착하여 아이를 내려놓고 밥을 지으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무엇을 집어 먹었는지 열이 나고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젖도 먹지 않고 축 늘어지고 말았다. 먹이면 토하고 고열로
몸은 불덩이처 럼 달아 올랐다. 목이 쉬었고 기침하는 소리가 안타깝게
들릴 뿐, 이미 폐렴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약을 구해서 먹여 보았으
나 소응이 없었다. 나는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가슴이 뛰고 불안이 엄
습해 왔다. 이미 우리 일행 중 세 어린이가 생명을 잃었기 메문이었다.
    이제는 내 차례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온몸이 얼어 붙는 듯 했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 있는 수단을 다 썼으나 병은 차도가 없었다. 희망이
없는 것으로 단정짓기에 이르렀다. 온 교우는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앞
에 간절히 기도를 드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늦은 것으로 포기하고 교우들은 분담하여 장사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
다. 나는 내 정신이 아니고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를 무릎에 놓고
두 팔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를 죽음에서 건져주신 아버지!그 사
랑을 다시 한번 베풀어 주옵소서, 이 죄인을 용서하옵소서! 이 아이를
고생 중에 낳았을 때 하나님의 일꾼으로 바친다고 했었는데 저에게 잘
못된 점이 있습니까? 저의 잘못을똥서해 주시고 어린 생명을 살려 주
옵소서. 이제 갓난어린 생명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다니 하나님 너
무 하십니다. " 나는 목을 놓고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나 자신부터 회개했다 울면서 회개할 때 나의 죄가 굉장히
많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다윗 왕이 압살롬을 찾아 울듯이 안타깝
게 서럽게 울며 밤새도록 매달렸다. 함께 기도하던 남편은 너무나 피
곤하여 잠이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
하시옵소서. 나를 죽여주실지라도 이 어린 생명을 살려주십시오.' 주
님의 섭리에 의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대로 해버린 불순종의
심한고통과 괴로움으로 울며 내 심장에 매질을 했던 것이다.
     빛이 창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동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내
려놓고 밖에 나가 물을 끓여서 먹여보려고 아이를 들여다 보았다. 아
이 숨소리가 아주 고요해졌다. 그렇게 악을 쓰며 을던 울음을 멈추
고 주는 물을 받아 삼켰다. 아이가 깨어났다. 지친 남편을 깨워서 동태
를 살펴보니 어젯밤과는 아주 달라졌다. 숨소리가 부드러워진 것이다.
젖을 빨려 보았다. 잘 먹었다. 소화도 시키는 듯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
이다.
    하나님이 어린 생명을 살려주신 것이었다. 우리 내외는 무릎을 꿇
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감격의 눈물이 한없이
솟구쳐 올랐단. 궁금하여 새벽같이 찾아온 교우들은 경탄하며 기뻐했
다. 지난밤 이곳에서 쌓아진 기도의 제단을 그들은 알 수 없으리라.
    나는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되었고 엄동설한의 혹한 속에서도 의욕을
가지고 매사에 정진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방을 찾자마자 아이에게
젖도 못주고 다시 나온 일도 있었다. 빈 방을 발견하고서 업은 아이를
내려놓다가 옆방의 인기척을 들었다. 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니 아이 엄
마가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 마을에 홍역이
만연하여 전란 중에 약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고는 나는 아이를 미처 업지도 못하고 황
급히 그 집을 뛰쳐나왔다.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우리는 경북 상주군 옥천 땅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다 아이의 건강회복을 위해서도 그러했고 교우들도 지쳐 있었기
때문에 잠시 머물기로 다같이 동의하였다. 우리가 신세를 지고 있던
집의 주인은 정미소를 경영하는 착한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예수
를 영접지 않았으나 성품이 곱고 마음씨가 좋은 분들이었다. 그들은
정미소에서 나온 쌀로 우리들을 후대해 주었다. 추운 겨울에 피난 다
니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동정을 하였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날마다 예배하는 것을 흠
모하며 기뻐했다. 그 주인은 아주 그곳에서 같이 살자고 하였다. 그리
고 그곳에 교회도 세우자고 하였다. 피난 길에서 이렇게 마음씨 좋은
분을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는 아이를 업고 고향 예천으로 다시 찾아갔다. 어머니를 먼저 찾
았다. 어머니가 계셔야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서 대환영해 주었다. 아버지는 약을 지어 오셨고,  어머니는 열심히 간
호해 주셨다. 드디어 3월 21일, 아이의 첫돌을 맞았다. 할머니는 손자
의 돌을 정성껏 차려 주셨다. 흐뭇한 광경이었다. 승광이는 토실토실
건강하게 자라게 되었다.

온천동교회로

    피난민의 물결을 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보니 부산 성결교본
부 수정동성결교회까지 오게 되었다. 그곳이 피난민의 본부가되었다.
아직 쌀쌀한 날씨는 아이를 마룻바닥에 누이기에는 무리였다. 멍추지
않는 칼바람이 원망스럽기조차했다 다행히 같이 간 어머니가 아이를
보살펴 주셨다. 수정동교회는 언덕 비탈길에 있었기 때문에 평지에 내
려가서 물을 길어 올라와서 밥도 지어먹어야하는 피난생활의 연장이
었다. 그때 수정동교회에서 성결교 총회가 열렸다
    남편은 소정의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우리는 모두가
기뻐했고 감격했다. 피난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겪고 살아남아 하
나님의 사명을 받게 되었으니 감개무량하였다. 동시에 목회 후보지가
나왔다. 밀양, 진주와 온천동교회가 나왔을 때 우리는 기도했다. 안정
된 기성교회는 밀양교회와 진주교회이다. 그러나 가장 약한 개척교회
로 가기로 했다. 대우받는 교회보다 젊었으니 밑바닥의 고난의 길을
택하여 최선을 다해서 사명을 감당해 나갈 것을 결심하고 어머니께도
말씀드릴 때 어머니도 함께 기뻐하며 기도해 주셨다.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향해 힘차게 내어 디뎠다. 빈털터리
피난 보따리를 들고 아이를 업고 기차를 타고 부산 동래에 있는 온천동교회
를 향해갔다. 본토인 부산 동래에 사는 이천석 집사의 마중을 받고 이
틀밤을지냈다. 온천동교회를 찾아보니 적산가옥 이층인데 이북에서
남하한 피난민들이 살고 있었다. 두 가정이었는데 이북 진남포에서 남
쪽 끝까지 살기 위해 와서 노점상을 하며 연명하고 있었다. 당시는 어
느 교회나 다 피난민을 받아들이는 형편이었다. 이 두 가정은 우리를
보자 깜작 놀라는 표정으로 맞이하였다. 이북에서 신앙을 지키려고 남
쪽으로 왔으니 서로 통하는 점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같이 지낼 수 있
게 되었다.
    낮에는 나가서 일당을 벌어야 하는 처지에 새로 오신 목사를 이런
곳에서 고생하게 해서 걱정 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동지
환이니 서로 위로하며 살자고 하며 기쁨으로 받아들여 같이 지낼 수
있었다.
    며칠이 못돼서 식량이 떨어졌다. 돈도 가진 것이 없었다. 나는 아이
를 업고 뒷산인 금정산으로 산보 아닌 산보를 나갔다. 숲이 우거진 산
속에서 허기진 창자를 움켜쥐고 하나님께 매달려 사명 감당케 해달라
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절실한 부르짖음으로 한참을 울고 기도하고
나니 배도 고프지 않았고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산기슭 오솔길을 따라 찬송을 부르며
내려오자니 같이 사는 신자들이 산을 헤매며 찾아 올라오고 있지 않은
가! 나를 보자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사모님 죄송합니다. 한 집에 살
면서도 보살펴 드리지 못해서 이런 꼴이 되었군요." 무척이나 안쓰러
워했다. 장사하는 그들이라 잠시도 틈을 내지 못하는데 찾아다니게 했
으니 나 역시 미안했다. 우리의 살림을 다 본 모양이다.
    그때부터 두 가정은 우리 식구의 먹고사는 것에 신경을 써서 보살
펴 주었다. 처음 주일에는 105명이 예배를 드렸으나 교인이 차차 늘어
나 좁은 2층 방까지 예배장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계단까지
앉게 되었으니 아래층에 있는 피난민들은 집 무너진다고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 식구는 강대상 옆에 자리잡고 지냈다. 교회가 신자의 소유
인 이 집에 월세를 내고 교회로 쓰는 형편이니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임시 몇 명의 제직원이 모여서 그 가옥을 사기로 결정하였다. 교회는
점점 부흥되고 있었지만 모두가 피난민이며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도
힘든 가정뿐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올 때 구제품 한 보따리를 받았을
뿐 무일푼이었다. 우리는 먼저 교회 매입헌금으로 100만 원을 믿음으
로 적었다. 신자들도 힘에 겹도록 작정하여 교회 구입하는 일이 강행
되었다.
    우리가 받은 구제품 보따리와 옷가지가 기적을 베풀어 100만원의
약속된 헌금을 내놓을 때 모두가 힘을 합해서 교회를 구입하게 되었
다. 적산가옥으로 된 집은 방 세 칸과 마루까지 합쳐서 큰 교회가 되었
다. 내부에는 풍금도 준비되었고 찬양대도 앉게 되었고 여전도회, 주
일학교까지 세우고 교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피난민들이 모여 세
운 교회로서 종각까지 세우게 되었으니 그때의 감격이란 표현할 수 없
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시점에서 복음 전하는 귀
한 사업에 전폭적으로 헌신 할 때 활기 있고 용기가 생겼다. 진정 초대
교회와 같이 사랑으로 뭉쳐진 한 덩이의 뜨거움을 맛보게 되었다. 교
역자란 이러한 역사와 움직임을 볼 때 생명을 바쳐도 아까울 것 없어
헌신과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점점 부흥되어 예배당이 차고 넘쳐 마루 문을 열고 문 밖까
지 의자를 놓을 만큼 성장하고 있었다. 임동선 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전쟁에 상처입은 심령들을 싸매며 위로하며 사랑으로 용기를 불어넣
어 주었다. 그 설교에 힘을 얻은 교인들은 믿음을 얻고 활기를 얻게 되
었다.
    한편 한국전쟁은 끝이 나지 않고 1953년 7월에 휴전상태에 이르렀
다. 부산에 있던 정부기관이나 학교들은 서울로 복귀할 수가 없어 현
지에서 자리잡고 시정이나 교육을 펴게 되었다. 그에 따라 서울신학교
도 부산에서 개교를 해야 했다.
    그 기회에 우리 교회는 서울신학교를 임시교사로 사용할 수 있도륵
유치하여 귀중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하였다.
100여 명의 신학생들이 교회 안에서 기거하며 낮에는 강의를 받게 되
었다. 부엌 옆에 붙은 우물 덕에 많은 식구의 숙식도 무난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귀한 일이 어디 있을까! 참으로감사했다. 교회에 붙어 있는
큰 방은 이명직 목사님께 드리고 우리는 작은 부엌방을 사용했고,피
난민 중에 환자가 있으면 우리가 쓰는 방을 양보하고 기도를 받게 하
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예전처럼 강대상 옆으로 가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러나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환자들의 시중을 들었고
찾아오는 손님이나 배고픈 사람과도 함께 지낼 수 있었다.
    그 해에는 심한 흥년이 들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밀가루를 반죽하
여 국수를 밀어서 나누어 먹으며 매일 10여 명의 손님을 치르기에 바
빴다. 아무리 곤란해도 피난시절에 얻어 먹던 때를 생각하고 항상 하
나님께 감사하며 지낼 수 있었다. 나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천국이 아
닌가 생각하고 천국의 일면을 연상하며 즐거움에 넘쳐 있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믿으며
      서로 바라보며
      서로 마음을 주고 받으며
      서로 용서하고

    사람마다 입가에는 언제나 기쁨이 가득차 있었다. 피난의 괴로움이
나 걱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편은 한 발만 내디디면 신학교 강의
를 청강할 수 있었으니 그의 평생 소원이 쉽게 이루어진 것이다.
    주일이 되면 많은 교수님들을 앞에 모시고 젊은 정열을 다 기울여
열렬히 설교를 할 수 있었으므로 많은 훈련이 되었다. 젊은 초년생 목
사는 정성껏 준비한 설교를 스승들 앞에서 행할 때 매사에 조심성 있
게 준비했으며 감사하며 설교했다. 그리하여 교수님들의 깊은 관심과
예리한 평가를 받으며 꾸준히 성장해 갔다.
    교수님들은 임 목사가 열점을 다해 큰소리로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저 젊은 나무는 언젠가는 커서 거목이 되겠군." 하며 기뻐하였다.
    그후 신학교는 금정산 기슭으로 이동하여 천막을 치고 규모를 갖추
어 교육을 시작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신학도들에게 적합한 장소가 되
어 갔다. 우거진 숲속과 바위 틈의 산새소리와 흐르는 골짜기의 물소
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맛보게 되었고 컬컬할 때 찾아와서 하나님과 마
주앉아 기도하는 보금자리인 금정산은 잊지 못할 수양지이기도 했다.
    온천동은 조용한 휴양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인 까닭에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갑자기 발전되었다. 전쟁 중에 부상한 상이군인이
속출하여 3.1 육군병뭔이 생겨서 요양, 가료해야할 수많은 불구자가 모
여들었다. 교회 여전도회에서는 상이군인들을 방문하여 흐르는 개울
물에서 빨래를 해주기도 했다. 서울에저 내려온 조폐공사도 그곳에 자
리잡게 되어 인가도 많이 생기고 남북간의 교류도 이루어져 다양한 형
태 속에서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다. 역경에 처할 때 신앙은 급속도로
자라 대교회를 이루어 이름뿐이었던 온천동교회가 대교회로 부흥되어
갔다.


공군 군목으로 입대

    전쟁은 멎었으나 3.8선이 다시 그어지며 휴전이 되었다. 종전이
된 것은 아니었다 개울물을 막아놓다가 터 놓으면 물살이 세게 흘러
감같이 좁은 부산에서 모여 살던 많은 피난민들은 휴전이 되자 서울
을 향하여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3 8선 남
하가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을 위시한 16개 우방국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민족이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은 강대국 미국을 통하여 유엔의 동의
를 얻어 유엔군을 파병하셨으니 아직 두 동강이로 전화를 입고 있으
나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계심을 능히 알 수가 있다. 말세에 이 한국이
전 세계에서 뽑힌 제사장 나라로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명을 감당
할 나라라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이모저모로 우리들에게
연단을 주시고 훈련을 시켜서 언젠가는 하늘나라의 일꾼으로 쓰심을
확신한다.
    온천동교회는 끝없이 성장하여 장년만 500명으로 늘어났다. 그때
임 목사를 서울에서 청빙하겠다는 소식이 왔다. 경기도 여주읍교회에
서도 제직회를 열고 임 목사를 청빙하기 위해 여집사 한 분을 부산
으로 파견시켰다. 여주로 와서 목회를 해달라는 청탁이었다. 피난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편이 되었다. 사실 여주성결교회는 교역자들을 잘
대우하지 못하는 곳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의 유력한교회에 연락을 했다. 그곳
에 갈 수 없다는 통지를 했다. 그후 우리는 경기도 여주로 다시 올라갔
다. 그때 딸을 낳아 돌을 맞았고 우리 가족은 네 식구로 늘어났다. 복
잡하던 부산생활을 청산하고 한가로운 여주로 옮겨간 우리는 모처럼
평온을 얻었다. 엉성한 시가지는 폐허가 되어 있었으나 유난히도 파란
하늘만이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우리 가정이 여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교우들마다 달려와 부둥켜
안고 목을 놓아 울었다. 비록 시골교회가 경제적으로는 가난하다해도
순수한 인정과 사랑은 어느 도시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감동적인
면이 있었다. 남매를 거느리고 평화의 마을에 찻아와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하나님! 이곳에 오게 됨을 감사합니다. 새 힘 주시사 폐허된 교회
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간절한 우리의 기도였다. 이때가 1953년 9월이었다. 오곡이 무르익
은 계절이었다. 이제 우리 교인들도 신앙의 열매를 맺는 계절이 되어
야겠다고 소원하며 다시 열심히 일했다.
    이듬해 2월에 군에 입대하라는 소집통지서가 임 목사에게 날아왔
다. 여주읍성결교회는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성직자도 국민의 한 사
람이므로 예외는 있을 수 없었다. 그곳 지방 유지들까지도 임 목사는
여주읍에 필요한 사람이니 상부에 건의하여 입대하지 않도록 하는 운
동을 전개하고자 나섰다.
   그들의 후의에 감사했지만 그들의 행동을 만류하고 임 목사는 입대
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그때 성결교 본부에서는 국방부와 공군본부로
부터 공군군목요원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공문을 받고 있었다. 교
단 본부에서는 임동선 목사를 적임자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본부로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다.
    남편은 군목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하고 교회에 물어보았다. 교회에서는 공군군목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허락이 되었다. 당시 해병대 군목으로 있던 나의 동생 황재
열 목사가 지프를 타고 달려왔다. 남편은 피끓는 젊은이들을 향해
복음 전하는 일을 더욱 큰 사명으로 알고 수많은 군인을 위해 일해 볼 것
을 결심하고 황 목사와 의논하였다. 우리 식구는 미처 보따리를 내려
놓기도 전에 다시 떠나게 되었다. 모처럼 기다리던 담임목사를 만난
교우들은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섭섭하여 모두 울음바다가 되었다.
차에 매달려 몸부림치는 교우들을 떼어놓고 돌아설 때 나도 흐느껴 울
었다. 그러나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올라온 우리 가족은 다시 새출발을 해야만 했다. 항상 하나
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 가족에게는 여유가 뒤따랐다. 어머님이 다니
시고 온 가족이 나가는 서교동장로교회에 교역자가 공석이었다. 나도
서울에 올 때마다 이 교회에 출석했기에 서로 친근한 사이였다. 서교
동교회가 우리 식구를 영접하여 비어있는 사택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후임이 을 때까지 심방도 같이 다니며 신자들과 친근하게 지낼 수 있
게 되었다. 여호와 이레로 남편 입대 후 별대척이 없던 훈련기간에 큰
보호하심을 받아 편안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님이 옆에 계시니
남편이 없는 동안도 외롭지 않게 살아갈수가 있었다.

    사천비행장으로

     남편은 대전에서 6개월 동안 고된 훈련을 마치고 곧 공군장교 중윈로
임관되어 경상남도 사천비행기지로 배속되었다.
     우리 식구는 두 남매와 양딸인 은선이와 다섯 식구였다. 자도상으
로만 본 아주 낯선 그곳을 찾아가야만 했다 우리 식구는 그 동안 편안
하게 지내던 서교동교회를 떠나야 했다. 전쟁 중에 서로 헤어져서 고
생하며 찾아다니던 경험이 있었기에 고생이 되어도 같이 있기로 결심
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남편에게 자리를 잡은 후에 가족을 데려가
라고 충고를 하셨다.
    우리 다섯 식구는 서교동 교우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삼랑진에서 내려 진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탔다.
진주에 도착되었을 때는 밤 11시경이었다. 그곳에 군종하사관 김 상병
이 마중을 나와 있어 공군버스로 사천읍으로 들어가 여관에서 하룻밤
을 지내겠 되었다. 남편은 그 다음날 아침를 곧 부대로 들어가 부임신
고를 마치고 나왔다.
    우리들은 거처할 집을 찾아나섰다. 낡은 초가집 하나를 겨우 얻었
는데 그 집은 울타리도 없고 문도 없는 초라한 집이었다. 도배를 하고
그 집에 여장을 풀고 살림을 차리니 그나마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천장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방안에 있는 장판
이 들뜨기도 하고 쥐들이 천장에서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루는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천장 위로 들아 다니던 쥐가 물에 젖
은 천장이 찢어지면서 밥상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들과 나는 기
겁을 했다.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고된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우리 주님과 사도 바울의 고된 역경을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
으로 지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동네사람과 사귀기가 무척 힘이 들었
지만 곧 친해졌다. 남편은 군목이라 대민봉사로 바쁜 날을 보냈다.
    나는 병원 환자들인 장병과 친교를 맺으며 위로도 하였다. 인근 민
간교회의 여전도회 회원들이 떡과 과일을 가지고 환자들을 위로하러
갈 때 같이 참석하고 인도도 하였다.
    사천공군군인교회에서는 유치원을 세워 장교 가족, 하사관 가족,
문관 가족들의 어린 자녀들에게 정서교윽을 시켰다. 이 유치원 운영으로
장교와 사병들의 가족이 화합할 수 있고 대화의 광장이 되기도 했다.
임 목사는 유치원 원장이 되었고 종무하사관은 매일 아침마다 버스로
어린이들을 태워 유치원으로 데려왔다. 유치원 건물은 임시건물로 막
사를 아담하게 만들고 치장도 했으며 보모도 모셔다가 아이들을 가르
쳤다.
    나는 사천에 있는 동안 군대 내의 고급장교 부인들과 친근하게 지
낼 수 있었다. 그중에 기독교인들도 있어서 서로 신앙으로 마음을 열
어놓고 애로점도 이야기하고, 발전할 수 있는 점을 의논하며 재미 있게
지냈다. 특히 유치원 자모로서 상하가 단결하여 친교를 나누며 지내니
기지교회는 점점 성장하였다.
    임 목사는 젊은 청년들에게 복음을 심어 주어야 이 나라의 장래가
희망적이라고 늘 이야기하였다. 막상 집단적으로 모여있는 군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니 그 사명을 다하는 것 같고 효과적이라 기뻐하였다.
륵히 꿈을 안고 공군에 입대하여 비행훈련을 받는 도중 불의의 사고로
죽어가는 젊은이를 볼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또한 군인들이 제한된 삶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아가는 것을 볼 때 대
견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남편은 가끔 그 지방 민간교회에 초청되어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고
설교도 하며 집회도 하였다. 그럴 때에는 군대버스를 동원하여 함께
가서 찬양도 불러주었다. 민간인과 군인들이 믿음 가운데서 서로 위로
하고 사랑하는 광경이었다. 우리의 사명은 외로운 그들에게 신앙을 심
어주며 위로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것이었다. 보람을 느꼈다.
    외출날이 되면 나는 사병들에게 김치와 된장찌게 나물 등을 풍성하
게 먹였고 따뜻한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한 때
를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복음의 씨앗은 널리 뿌려졌다. 교
회도 부흥되고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둘재딸을 다시 선물로 받았다.
우리 가정은 바쁜 스케줄 속에 분주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
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 복음은 사천비행장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으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공군관사인 부단장 관사로 옮기게 되었다. 이 집은 흉가로
마귀의 역사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찬송하며 언제나 예배를 드렸기
에 평안히 살게 되었다. 그 집은 옛날 구황국시대 때 사형터였다고 했
다. 집이 커서 반을 막고 울타리를 해서 두 집이 살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두'가정이 살았는데 두 집의 두 조종사가 다 사
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 연고로 집이 비어 아무도 들어가서 살 사람이
없다하여 우리에게 입주가 허락된 집 이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집에
입주하여 편안히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어두컴컴한데 일어나니 집 뒤 숲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이 왔다갔다 하기에 무심코 사람이 다니나보다 생각했다. 그
러나 아침에 나가 보니까 집 앞 큰 나무에 누가 목물 매어 죽어 있
었다. 자식들 교육상 불쾌하였으나 우리는 믿음으로 견디었고 아무
일 없이 3년을 살게 되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귀하다고 느
꼈다. 사천과 삼천포와 진주일대의 작은 교회에도 기회있는 대로 가
서 복음을 전했고 대민 친선에 이바지했다. 순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지금도 경상도 사투리만 들어도 친밀감을 느낀
다.

서울로 전속

    남편은 사천에서 3년 동안 근무했다. 그후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
되면서 서을로 전속하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교회의 성도들과 동네
사람들과도 정이 많이 들었다. 동네 사람들 말이 사천은 울며 찾아와
서 울며 떠나는 곳이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도 아쉬움을 안고 떠나야만
했다. 안정될만 하니 다시 짐을 싸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 동안
시부모님도 모시게 되었다. 추운 겨울을 지내고 가기를 원했지만 넷째
아이를 가진 까닭에 어머니에게로 가서 안정을 취하고자 이사를 서둘
렀다. 남편도 가족을 멀리 두기를 원치 않았다.
    남편의 그후 서울생활은 더욱 바빴다. 더 많은 집회와 출장으로 집
에 들어올 시간의 여유도 없었다. 군종 실장이 된 후 군종 업무는 날로
활발히 진행되었고 서울 시내를 중심으로 하여 민간교회의 순방집회
도 했고 군민 친교의 유대도 날로 두터워졌다. 그밖에 전공군예하단대
와 제주도, 백령도까지 다니며 도의교육,부흥회 등을 하며 바쁘게 지
냈다. 나는 그동안 막내 아들을 건강하게 낳았다. 점점 책임이 무거워
져서 가정을 위해 큰 힘을 기울였다.
    남편은 1958년 8월에 미국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미국 군목 업무의
학과목을 공부하고 어학을 익히고 미 전역 시찰차 텍사스 성안토니오
믹크랜드 공군기지를 5개월 동안 다녀왔다.
    그후부터 남편은 늘 군목업무를 마치면 더 신학을 연구할 기회를 갖기
를 원하고 기도했다. 남편은 언제나 바울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꿈을
달성하기 위해서 보다 폭넓게 일하려면 실력을 쌓기를 소원하고 하나님
께 기회를 허락해 달라고 항상 기도했다. 남편은 한국전쟁 때 납치된 형
님의 몫까지 일할 것을 입버릇처럼 말하고 굳은 집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단계로 학교에 진학할 것을 나는 권했다.
    군대에서 주는 지프와 운전수가 있기에 숭실대학교에 입학하여 바
쁜 일과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아침 일찍 부대로 출근해서 사무정리
를 한 다음 학교로 달려가서 공부하고 못다 배운 학과는 급우의 노트
를 빌려왔다. 그러면 나는 대신 노트정리를 했다. 철학과의 과정이 나
에게는 아주 흥미로워서 공부도 할겸 기쁘게 정리해 주었다
    자식들도 이제 자라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산비탈에 조
그마한 대지를 구입하였다. 비탈길을 정리하고 무허가 집을 지으려고
직접 설계하고 일꾼들의 수종도 들어가며 건축현장에 나가 식구들과
함께 집을 지었다. 흙 바닥에서 잠자고 기거하며 고생했으나 나는 기
뻤다. 이제는 우리도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니 감사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 환경이 이루어지기까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 않은가!
    그 작은 대지 위에 나의 작품들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첫번째로 염
소였다. 언덕의 수풀을 이용해서 키웠으며 영양보충을 위해 젖을 짰다.
두 번째로 닭을 치게 됐다. 넓은 뜰에서 닭을 칠 때 식구들에게 달걀을
줄 수 있었다. 세 번째로 돼지를 기르게 되었다. 언덕이면 이웃에게 더
러운 오물로 불편을 주게 되나 넓은 마당 한 모퉁이가 안성마춤이었
다. 내가 이처럼 악착스럽계 생활전선에서 애를 써야 집안이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자식들이 커가고 있었다. 교육문제가 대두되
었다. 변두리 환경속에서 자녀교육이 적합지 않음을 느끼고 우리의 생
  활을 정리하고 도심지로 나갈 것을 결심했다. 후암동에 있는 영단주택
을 매입하교 아이들을 삼광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가난하게 살아도
자녀교육만은 철저히 시키자는 목표를 세우고 나섰다.
     그리하여 맏아들을 경복중학교에 입학시켰다. 바로 이웃에 있는 용
산중학교에 입학시키도록 남편은 바랐으나 보다 나은 학교에 다니도
록 멀리 보내게 되었다. 맏딸은 수도여자중학교를 바로 앞에 두고 이
화여자중학교까지 보냈다.
     4남매는 나의 소망이었고 기쁨이었다. 나의 어머니께서 딸인 나에
게 기대를 걸었던 이상으로 나도 자식들의 모든 꿈과 이상을 실현시켜
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 성장하기를 바
라지 않겠는가마는 어머니께 받은 교육은 나의 4남매에게 전달되어
가고 있었다. 경주장에서 달음박질하는 선수와 같이!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날은 월요일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기에 온 식구가 환영하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에
게 아버지의 입장을 설명해 주었다. 나라위해 몸 바친 일꾼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전도하기에 바쁘니 가족들끝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며 같이 기도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역할까지 내가 감당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아이
들은 아버지는 으레 밖에 나가시거니 하고 불평하지 않았다. 남편은 군종
감으로 승격하고 대령으로 진급하여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분주하게
군대생활 11년이 흘렀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고된 군대 기간이 만기가 되
어 옷을 벗게 되었다. 누구나 제대하면 사회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예편 후 민간교회 목회를 할 것인가 전도를 다닐 것인가 멀리 유학
의 길을 떠날 것인가 생각하며 기도히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떠나 보내며

    남편의 제대할 날짜가 정해졌다. 군복을 벗게 되면 때를 놓치지 않
고 곧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날 것을 권하고 계획했다. 앞서가는 정
신 세계에서 사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더 깊고 넓게 배워서 크게 일해
야 평신도보다 앞서서 가르칠 것이 아닌가. 짧은 지식이나 신앙이 오
래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비장한 각오를 하기로 했다. 그러
나 4남매를 데리고 교육시키며 살길이 막연했다.
    남편을 하나님 앞에 약속한 목사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반듯이 설 수 있는 실력 있는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
했다. 틈만 있으면 산상 특별 집회에 나가 간구했다. 고생이 되어도 이
루어 보리라 결심하자 서울 시내 여러 교회에서 청빙이 들어왔지만 유
학의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막상 떠나기로 결정하고 보니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거액
의 여비와 학비,그리고 남은 4남매의 학비와 생활비가 큰 문제였다.
큰아들은 고등학생이고 딸은 중학생 또 그 밑으로 또 중학교에 진학해
야 하는 둘째딸도 있었다. 나는 한 가지씩 해결하리라 생각하고 데리
고 있던 수양딸을 결혼시켜 살림을 차려 내보내기로 했다. 생활도 검
소하게 하리라 결심하고 부엌시설도 개조하고 살림을 줄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설교집을 출판할 것을 상의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 속마음도 모르고 미국 가서 실력을 쌓고 돌아와서 출판해도 늦지
않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계획대로 어느 신자에게 부탁해서 녹음기를 빌려와서 부흥
회가는 곳마다 가서 설교를 녹음을 해왔다. 나는 녹응된 설교를 매일
매일 원고지에 받아 써내려 갔다. 아이들이 잠이 드는 10시쯤 시작하면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교회의 새벽종이 들려왔다. 그렇게 하여 20~30
편의 설교문이 완성되었을 때 어느 중노동 못지않게 눈앞이 흐려지고
피곤했지만 내색을하지 않았다. 남편의 설교집을 정리하며 나 또한 많
은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다.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은혜를 주시고 낙망
중에도 새로운 소망이 넘치도록 하여 주시고 성령 충만케 하셨다.
    장로교 신학생 김충남 씨에게 교정을 부탁해서 설교집을 완성하고
남편에게 가지고 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남편
은 나의 정성에 감동했는지 제대금으로 인쇄비를 충당케 하고 「절망
의 극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집을 출간케 되었다. 나는 한 가지를 해
냈다는 성취감에 감격했고 앞으로의 생활에 자신감이 생겼으며 새로
운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책이 출판되고 나는 상당히 피로해 있었다. 마침 일본 동경에 있는
큰동생과 둘째동생의 초청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일본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어머니의 회갑기념 여행인 것이다. 틀림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임을 깨닫고 만사를 제치고 여행을 떠났다. 그때 비
로소 나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 넓은 세계를 향해
서 눈을뜨게 되었다. '시대적인 변천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 나
는 남편의 배움의 길을 돕기 위해 더욱 마음을 다졌다. 도쿄. 요코하마,
경도, 일광, 아다미 등 여러 곳을 관광하고 서울로 돌아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서울 막내아들로부터 보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당장이라도 뛰어가고픈 그리움이 솟아올랐다. 막내
아들의 동그란 얼굴이 아른거렸다. 부랴부랴 어머님을 동경에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남편이 미국을 떠나면 설교집을 팔아서
생활비로 충당하리라는 계획을 세웠다. 나는 4남매의 교육을 위해서라
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다.
    라일락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오월, 남편을 미국으로 떠나보내는 바
쁜 준비과정을 끝내고 나 혼자만의 침묵의 시간을 맞았다. 커다란사
건을 앞두고 찾아오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조용한 침묵의 시간에 나는
새로운 내일을 다짐했다.
    남편은 1965년 5월 18일 드디어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남편이
없는 동안의 생활비를 인세로 충당하려고 했던 나의 기대는 오산이었
다. 나는 취직하리라 마음을 먹고 사회사업기관인 캠패션에 취직을 했
다. 나는 성경통신과를 담당하였는데 각 고아원, 모자원 등에서 가르
친 성경문제의 답안지를 보내오면 채점 후에 각 기관으로 보내는 일이
었다. 남편의 공석을 메울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처럼 선한 길을 열
어 주셔서 생활의 일부를 부담하게 된 것이다. 가정, 아이들 교육, 직
장의 업무가 나에게는 과중한 일이었지만 인내할 수 있는 저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바울 선생의 신앙을 본받아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구했다.
    늘어만 가는 아이들의 교육비 때문어 나는 집안의 물건을 하나씩
팔기로 했다. 큰딸에게 중학교 입학기념으로 사주었던 피아노를 먼저
처분했다. 그 다음 순서는 TV였다. 아이들이 허전해 하였지만 공부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팔았다. 그 다음으로 전화기가 없어졌다. 나는
아이들이 쓸쓸해 할까봐 여러 가지 신경을 쓰고 공부를 위해서 경비를
줄이지 않았다.
    남편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 혼자서 살림을 꾸려 나가느라 옆을 돌
아볼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경제적으로
는 어려움이 컸지만 장시간 가족이 떨어져 산다는 것은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었다. 철모르는 막내아들의 편
지에 자극을 받은 남편은 가족과 상봉하기 위해서 영주권을 신청하기
에 이르렀다. 남편의 편지를 받고 나는 미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었
다. '고생을 하더라도 한가족이 모여서 살리라. 서로떨어져 그리워하
며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보다 모여서 함께 살리라.' 하고 마음에 결단
을 내렸는데 그때 큰아들 승광이가 고등학교 졸업반이라는 것이 마음
에 걸렸다.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떠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되어 졸
업 때까지 머물게 하고 삼남매만 데리고 갈 계획을 세웠다.
    가산을 정리하고 집을 팔았다. 경비에 얼마간의 비용이 지출되고
나머지 돈은 임시로 어떤 분에게 맡겼다. 그러나 떠나기 며칠 전까지
도 돈은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빈손으로 떠나야 하다니' 미국은 자
본주의 국가인데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생각하니 남편에게 면목도
없고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스러웠다. 어려운 일 당할 때는 항상 주님
께 달려가게 마련이다. 주님을 꼭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심
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주님 ! 믿습니다. 모든 것을 믿사오니 지켜 주시옵소서."



제 3부 미국생활

상 봉
  

   아이들과 나는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별처럼 빛
나는 서울을 내려다보며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보는 서울은 금,은,
보석이 반짝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내 조국! 어머님의 나라여 !
    이제 비행기가 날아가서 내리는 곳에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나의 남
편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 생각
만해도 마음이 설레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비행기 트랩을 올라을
때만 해도 기분이 좋아 날뛰던 아이들이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몰랐다.
나는 아이들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세 아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조국 땅을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슬펐던 것이다.
그렇게도 작고 약한 한반도가 아이들에게 위대하고 또 소중하여 내 조
국을 떠나는 심정이 몹시도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어린 삼남매에게 그
레도 민족의 혼이 담겨져 있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대견스럽고 한편으
로는 고마웠다.
    비행기는 진동 없이 수평을 유지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창가로 내
려다 보이는 것은 맑은 하늘과 파랗게 보이는 바다뿐이었다.
    어머니, 그리도 슬퍼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이 못난
여식을 위해 너무나도 크고 위대한 생애를 바쳤는데 이제 곁을 떠난다
니 하늘이 내려 앉는것 같이 슬피우셨다. 이제까지 무엇이든 상의하고
해결하며 서로 위로하고 살았는데 어머니의 곁을 떠나면서 그저 용서
를 빌 따름이었다. "어머님,꼭 성공하여 돌아오겠습니다. " 혼자 다짐
하며 기도하였다. "고마우시고 용기 있는 어머님,이 못난여식 때문에
고생을 고비고비 다 겪으셨는데 이제 봉양하기에 앞서 떠나갑니다. "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게 되면 딸이랑 외손자들 먹이려고 몸소 가지고
오시던 그 모습이 나의 눈에 떠올랐다. 떠날 때도 서러워 마주잡고 실
컷 울었는데 어머니 생각에 나는 또다시 울고 말았다. 생전 처음타는
비행기였으나 호기심도 걱정도 없이 우리 네 식구는 벌써 향수에 젖어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이틀동안 일본의 공
기를 쏘이며 체류하게 되었다.
    다시 LA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태평양이 굽이치는 찬란한 파
도를 건너 드디어 LA에 도착하였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LA는 찬란한
불빛이 눈부셔 요술궁전처럼 보였고 네온사인은 수많은 별을 깔아 놓
은 듯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나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한국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공항에 내렸다.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에 들떠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환영나왔다. 남편과 함께 가족
처럼 지내던 분들과 교회의 신자들이었다.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공항
을 벗어나 남편이 생활하던 집에 도착했다
    싸늘한 방에는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낡은 소파 한개
가 살림의 전부였다. 허술한 방 한 구석에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남편
은 아내를 맞이하는 정성으로 탐스럽고 향기로운 흰꽃 한 아름을 꽃아
놓아 마음을 전하였다. 남편이 얼마나 혼자서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한쪽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콧날이 시큰해짐을 느꼈
다. 실로 만 2년의 상봉이었다.
    식구들 모두 기쁨과 생기에 넘쳤다. 막내는 마구 뛰어다니면서 좋
아하고 있었다. 서울에 두고 온 맏아들만 빼고 다섯 식구가 오랫만에
즐거운 식탁에 마주앉았다. 미국에 온 기분이 어떠냐고 막내아들 승천
에게 물었다. 승천은 좋은 곳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으나 의외의 대답
이 나왔다. "아버지, 미국은 한국만 못한 것 같아요. 나는 우리 나라가
좋아요." 승천이가 느낀 미국은 환경이 나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직
감했다. 모든 환경이 한국보다 못하다는 것은 당연했다. 주변에는 고
층건물도 없었고 길거리에도 차만 왕래할 뿐 걸어다니는 사람이 보이
지 않는 곳이었다. 아들은 한국에 비해 그곳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발 뒤꿈치를 들고 다녀요!"

                  사계절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LA는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너무
              변화가 없는 듯 싶었다. 길가에 늘씬하게 솟은 팜트리는 이국의 점취
              를 풍겨 주었고, 우리 가족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갖추어 가
              고 있었다.
                 특히 LA는 한국에 비해 건물로는 뒤지는 듯 싶었다. 이곳이 지진층
             이었기에 고층건물 짓기가 힘들고 거의가 나무집으로 지어져 있기 때
             문이었다.
                 하꼬방같이 지어진 초라한 가옥들이 LA에 즐비하다. 이 겉모양만
             보고 미국의 건물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너절한 것 같은 건물의 내부에 들어가서 보면 정말 놀라웠다.
             너무나 편리하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건물의 내부는 실질
            적으로 지어진 매력 있는 집이었다.
                이층에서 막내아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노는데 아래층에서 매니
            저가 올라와서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뛰지 말라는 신호였다.
                이 신호가 있은 후 온 집안에 경계령을 내렸다. "발 뒤꿈치를 들고
            다니세요" 하고 써붙였다.
                막내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미국은 자유가 많다고 들었는데 이것이 자유입니까?"
    남편과 나는 깜짝 놀랐다. 누나들은 여자인지라 그렇게 뛰놀지 않
아서 괜찮은데‥‥‥‥ 나는 마음이 아팠다.
    한국에 있을 때 남편 부재시에 우리 집을 팔았다. 그리고 그 집 판
돈을 남에게 빌려 주었으나 돌려 받지 못하고 맨손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 만약 그 돈만 있었던들 아이들이 부자유한 이런 곳에서 살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나는 내친김에 남편에게 이러한 사정을 고백했다. 남편은 나의 말
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빈손으로 온 면목 없는 나
에게 책망이나 불쾌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내 승천이가 8살이
니 한참 장난할 나이인데 걱정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 곳에 더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미국인 노파가 혼
자 살고 있던 하이랜드 파크로 이사를 했다. 그 댁은 자녀들이 있으나
그 집에는 살고 있지 않았다. 넓은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방들이 비어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에 세를 얻어 이사했다.
    우선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큰딸은 고등학교에 입학시켰고
작은딸은 초등학교 5학년에, 막내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시켰
다. 처음 이곳에 이사 와서 막내딸과 막내아들이 학교에 갔다 오더니
산수와 미술시간에는 공부를 하겠는데 다른 시간에는 그저 앉아 있다
가 온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그때 살았던 동네는 백인동네였다. 그렇
기 때문에 아이들은 동네에서 백인들과 놀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인지
라 영어습득이 빠른 것 같았다. 낭편과 나는 안심할 수가 있었다.
    발 뒤꿈치를 들고 다니라던 LA 웨스트 레이크 쪽의 집에 비하여 환
경도 좋은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놀며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봉제공장

    막내는 철없이 한창 뛰어놀던 여덟살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아
이들을 위해서 찾아야 했다.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이곳에는 여자가
일할 곳이 없나요?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안정시켜 보겠어요." 먼저
내 결심부터 털어 놓았다.
    막내아들은 미국이 자유국인데 왜 우리는 자유가 없느냐고 물었지
만 엄마의 실수로 돈을 없앴기 때문이라고 나는 나 자신을 자책하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남편은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여자들이 바
느질 일을 하는 공장이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어떻게 " 하고 말꼬리
를 맺지 못하였다. 나는 재빨리 "나를 거기에 데려다 주세요. 힘껏 일
해 보겠어요.내 어머님이 바느질을 잘 했으니 나도 잘 할 수 있을 거
예요." 남편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다운타운에 있는 유태인이 경영하
는 봉제공장에서 바느질 일을 시작하였다. 내가 맡은 미싱은 파워미싱
이었다. 처음하는 일이라 너무 어려웠다.
    겨우 한 벌을 만들었을 때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운이 솟았
다. 그런데 이 완성된 옷을 보고는 바느질을 잘못 했으니 뜯어 내라는
거였다. 실밥을 일일이 떼어내고 있으려니 왈칵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
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참으며 지난날에 삯바느질하며 고생하시던 어
머님을 생각했다. 박기는 쉬웠으나 뜯기란 참으로 힘들었고 시간도 너
무 많이 걸렸다. 하루종일 미싱에 붙어서 일을 해도 완성품은 고작 몇
벌에 불과하였다.
    첫날에는 한 벌 그리고 둘째 날에는 두 벌 이런 순서로 점점 늘려가
면서 2주간이 흘렀다. 나는 2주간 일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마음이
찡 - 함을 느꼈다.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나에게 용기를 주는 결
정적인 계기였다. 내가 만든 옷이 상품이 된다니 기뻤다.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너무나 힘이 들어서 온몸이 쑤셨다. 공장에서 돌아오면
어깨가 쑤시고 팔다리 가저리고 하여 남편과 아이들에게 주물러 달라
고 부탁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나는 전진만을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서 힘들다고 주저 앉
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문하면서 ‥‥‥
    미국이 좋다고 찾아왔으나 실망스러운 점도 적지 않았다. 남편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요, 내 자녀의 성공이 나의 성공일진데 망설이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마음을 바꾸고 열과 성의를 다하는 일꾼
이 될 것을 마음에 다짐했다.
    한편 남편은 인쇄소에 다니면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렇다고 한
국에서 인쇄 기술을 배운 인쇄공 출신이 아니기에 그곳에서는 주로 잡
역이 고작이었다. 기술이 없는 남편과 나는 마음을 합하여 자리를 잡
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침 일찍 남편은 나를 차로 공장에 데려다 주고 또 저녁에는 나를
픽업하기 위해서 왔다. 지친 몸이었으나 남편이 찾아와 주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차 속에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여보! 수고 많았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우리도 안정될 것이니 너
무 염려마오. 몸도 생각해서 건강에 유의해야지요."
    남편은 나의 건강에도 신경을 써주었다. 우리는 대화 중에 어린 막
내아들에 관한 이야기로 피로를 달랬다.
    어린 삼남매를 두고 공장에 출근하니 불안한 마음이 언제나 마음
구석에 있었다. 한국에서는 딸 겸 가정부 겸 일해 주고 시중 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는 아이들도 저희 밥은 저희들이 찾아먹
어야 했다. 막내아들 승천이는 동네 백인 아이들과 어울려 뛰어 놀다
가 배가 고프면 집으로 달려와서 혼자서 계란만 프라이를 해서 먹곤
하였다. 누나가 없으면 저 혼자서 하루에 5~6개 정도를 먹었다고 했
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철없는 어린 것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서 어쩌
나 하며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나는 그 돈으로
제일 먼저 막내에게 자전거를 사서 선물했다. 혼자서 놀고 있는 것이
측은해서 사준 자전거는 아들에게 굉장한 기쁨이 되었다. 예전보다 더
밝고 신나게 놀았다. 아이들의 형편과 개성을 살리면서 키워 보려니
매사에 힘이 들었다.
    날이 감에 따라 내 재봉 기술은 늘어갔다. 기술이 향상된다는 것은
수입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차츰 공장 주인에게도 인정을 받
게 되었고, 우리 가정 생활비의 한 부분을 맡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도 나는 한국에 두고 온 맏아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어떤 갈증 같은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여 허둥대곤 했다. 식구들이 모두 모여 같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멀지않아 승광이와 만나
같이 살 것을 생각하면서 더욱 열심히 일에 몰두했고 그러면서 부어
오르는 종아리의 통증을 잊어 갔다.


유학생 뒷바라지

   주일이 되면 우리 가족은 더욱 바쁘게 보냈다. 당시 남편은 나성 한
인침례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며 한 달에 두 번씩 대예배 설교를 맡았
다. 나는 나대로 여전도회의 일을 했고 아이들도 각 부서에서 분주히
지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미국생활의 고생이나
불편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목적한 신학공부에 별 진전이 없어서 안타까워 했다.
강의를 들을 만한 충분한 어학 실럭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그 이유
였지만 마냥 어학공부만 지속할 수도 없는 것 이었다. 나는 초조해져서
하루는 남편에게 조용히 물었다.
     ·"언제까지 어학공부를 해야겠는지요?"
     기한을 작정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할 것을 의논했다. 무기한으
로 시간 낭비만 할 바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말문을 열었다. 한국
을 떠나을 때 3년을 작정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2년이 지나도록 입
  학도 못한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응은 착잡하기만 했다. 나는 조
  급한 생각에 그만 영어가 학업을 계속하는 데 어느 정도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초조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남편은 용기를 내어 부족
한 어학이지단 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포모나에 있는 남가주북침례교신학교에 1967년 9월에 입학하였다.
남편에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 생활비는 전적으로 내가
맡기로 하고 남편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옮겼다. 남편은 나를 다운타운
공장에 데려다 주고는 바로 30마일 이상 거리의 포모나로 달려가서 공
부했고 돌아오는 길에 인쇄소에서 일을 하고 나를 픽업하러 오곤 했
다. 무리하게 학교 입학을 한 남편은 강의시간에 강의 내용을 녹음을
해와서 계속 틀며 밤늦게까지 복습하기에 최선을 다했다.
   6개월쯤 지나고 나서야 강의가 귀에 들어 왔다고 한다. 마음 놓고
식구와 식사도 같이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남편은 몹시 바쁜 생활을 했다. 운전하는 역할까지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빨래를 하거나 시장을 갈 때면 기다리면서 공부하고 항상 녹음
기를 떼어놓지 않았다. 파사데나의 집에서 다운타운 등으로 먼거리를
다니면 시간 소비가 많음을 알고 시내로 이사했다. 생활비에 여유가
없는 우리는 엄두도 못 내었으나 부동산업을 하시는 조지 최에게 도움
을 받았던 것이다. 시내 아이로로의 집 한채가 오랫동안 매매되지 않
아 우리에게 양도된 것이다. 목사라는 신용보증으로 현금 없이 입주하
게 되었다. 그 집안에는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맨마룻바닥이지만 그
저 감사하기만 했다.
    그후에 여기저기서 헌 가구를 모아들였다. 허술한 가구이지만 우리
에게는 아주 유용한 물건들이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다"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식들이 마음놓고 뛰어
놀 수 있게 되었고 친구들도 데리고 와서 뒷마당에서 뛰어놀 때 나의
마음은 참으로 흐뭇했다.
    1968년 4월에 큰 아들이 한국에서 왔다. 성숙한 아들을 본 남편은
흐뭇해 하며 바쁜 시간을나누려고 먼저 운전을 가르쳤다. 힘은 들어
도 마음은 가볍고 푸근했다.
    이렇게 온식구가 모이니 날아갈 듯 했다. 마음 한구석의 빈자리였
던 맏아들이 미국에 오게 됨으로써 즐거움이 넘쳤다. 하루하루가 활기
찬 나날이었다. 주말이면 온 식구가 집 앞에 나가 잔디를 깎고 물 주는
즐거운 시간은 정말 평화스러웠다. 남편은 점점 고차원적인 어려운 신
학공부에 전념하여 보다 넓고 깊게 연구를 거듭하며 정진해 갔다.


노력하는 식구들

    4남매는 밝고 환하게 공부도 잘하며 성장했다. 큰 아들과 큰딸은 대
학에 진학했다. 큰아들 승광은 시간나는 대로 파트타임으로 뛰었다.
젊어서 고생은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곱게 키우고 싶었던 큰딸이 백인 집의 하우스키퍼로 가겠다고 말을
해왔다. 나는 가슴이 저려옴을 느꼈다. 하룻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딸
에게 가지 못하게 말렸다. 잘 살아보려고 온 미국 길인데 힘들다고 자
식 고생시켜 가며 남의 집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렇게 진한 아픔을 가져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마음이 송두
리째 찔리는 아픔이었다. 나는 어머니로서 더 노력해서 아이들에게 그
러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할 터이니 공부만 열심히 하도록 부탁했다.
내 간절한 부탁에 딸은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더욱 열심히 일을해서 남편과 4남매의 장래를위해
열중했다. 나 하나가 희생함으로써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거름이 된다
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나는 오버타임도 했고 내가 일하는 공장에
서 일이 끝나면 다른 공장으로 뛰어다니며 일을 할 때도 있었으나 힘
들지 않았고 기쁘게 일을 자청해 가며 해치울 때 더욱 몸이 건강해져
가는 것 같았다.
    집안 일은 딸들이 보살펴 주니 밤늦게까지 일할 수 있었다. 돌아와
서 피곤할때 한잠 자고 일어나면 몸이 거뜬해지고 생기가 났다. 한국
에 있을때는 몸이 약해서 주위에서 걱정을 했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
게 오늘의 사명을 위해 주신 건강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남을
부렸으나 이제 내가 남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으니 기뻤다. 그래서 교
회에서나 어디를 가나 가장 힘들고 남이 하기 싫은 일을 도맡아 할 때
내 마음은 오히려 기쁘고 보람을 느꼈다.
    또한 막내아들도 나름대로 일했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일거리
를 만들어 뛰고 있었다. 한인 청소회사에서 광고용으로 유인물을 인쇄
하면 할리우드 부잣집으로 다니면서 돌리는 일을 했다. 광고물을 어린
학생들에게 일감으로 주어 뛰게 하기도 했다. 승천이는 친구가 많았다.
서로 합심해서 일을 했고 친구간에도 인기가 높았다. 남편과 나는 밤
늦게 돌아오니 전연 알지 못했다. 나중에 그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막내가 용돈이 아쉬워서 그랬나보다 생각했고 그것 역시 내 책임이구
나 하였다. 하루는 승천이가 돈 20달러를 들고 돌아왔다. 일한지 2주일
만에 받은 노동의 대가였다. 처음 벌어본 돈이라며 그 동안의 과정을
이야기하며 한국에 계신 할머니에게 보내달라는 말을 했다. 뜻밖이었
다. 어디다 쓸까 고민하다 할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을 저 나름대로 생
각한 것이다. 온 식구가 한바탕 웃었다.
    막내는 항상 식구들을 웃겨서 집안에 화기가 돌게 하였다. 그렇게
벌어온 돈을 할머니께 보내고 어린 마음에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이 기
특하기만 했다. 딸자식이 불효한 몫까지 손자가 할머니께 하는구나 싶
어 눈물이 왈칵 솟았다. 이것이 그후 어머니를 미국에 모셔오는 계기
가 되었다. 살아가기에 바쁜 나는 어머니 생각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막내가 나에게 효도의 길을 터준 셈이다.
    빈손 들고 이 땅을 밟았지만 노력한 결과 3년 만에 살고 있던 집의
다운페이를 완납하고 명의를 우리에게 옮겨 놓게 되었으며 자동차도
새 것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때 남편은 신학교에서 신학연구과정으로
단체로 성지순례를 가게 되었다. 충실한 전도자가 되기 위한 연구의
기회라 생각하고 가기로 결정했다. 남과 같이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유
익한 일이면 아까울 것 없이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우리 가정도 여유가 생겨 기쁘기만 했다. 남편은 1970년도로 접어
들면서 나성 한인침례교회를 사임하였다. 공부를 마칠 때까지 미국 교
회를 순방하면서 경험을 쌓기로 했다. 그후 1970년 6월에 어학 때문에
더 힘겨웠던 신학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리인 듯 싶었으나
노력하면 못 이룰 것 없이 목적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다른 나라 말로 하나님의 세계를 터득한다는 어려움에 부딪쳐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무거운 짐을 내려 놓는 심정이
었다. 충실한 목사는 평생 노력과 연구를 거듭해야 되므로 더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온 가족은 아버지를 위로하며 축하하고 기뻐했다. 그
런데 그렇게도 소원했던 귀국이었으나 돌아갈 비행기 삯조차 마련하
지 못해 다시 돈을 저축하여 떠나기로 계획했다.


중노동의 날

    하루 8시간의 중노동을 끝내고 나서 길거리로 나오면 앞이 잘 보이
지 않는다. 어두운 실내에서 앞만 보고 종일 재봉틀만 밟았으니 무리
는 아니었다. 지친 눈엔 맑은 하늘마저 흐리게 다가온다. 미국인들과
같이 일하니 점심은 간단한 샌드위치로 때워야 했다. 출출하고 전신에
힘이 빠져 말할 기운도 없었다. 공장 문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서있
다가 차가 오기에 얼른 올라탔다. 지친 표정을 보고 남편이 먼저 "수고
했소'라고 할 때 위안이라도 되는 듯 나는 픽 웃고 말았다. 다행히 집
은 멀지 않아 15분이면 당도할 수 있었다. 자동차 한 대로 모든 볼일을
봐야 했기에 어떤 때는 버스를 타게 될 때도 있었는데 피곤한 몸으로
만원버스에 매달리는 어려움 때문에 가능한 한 남편은 픽업을 하러 왔
다. 남편은 아마도 미안하기보다는 가엾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집에 가면 또 하나의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시간을 지
체하면 식구의 저녁식사와 아이들의 공부시간이 맞지 않기 때문에 문
을 열고 들어서면 곧장 부엌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갖
지 못하고 부엌에 들어서면 부엌 안은 수라장이었다. 크지도 않은 부
엌에 모든 찻잔과 그릇이 다 나와서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바빴다. 그 많은 것을 언제 치우나 싶어 싱크대 한
  쪽으로 밀어 놓고 우선 쌀을 씻어 쌀을 안친다. 미국 쌀은 방부제가 많
이 있어 아무리 바빠도 열 번 이상 씻어야 한다. 전기를 꽃은 다음 국
거리를 준비한다. 하루 종일 신경을 써가며 공부하느라 피곤한 식구에
게 따뜻한 국과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준비하는 것이 어머니로서의
정성이었다. 그러나 집안 식구 뿐이라면 무관하지만 손님 몇 분이 오
시는 때면 허둥지둥 하며 몇 가지를 더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올 때 식구들을 동반하지만 그때만 해도 대개
싱글의 유학생과 혼자서 여행오는 사람이 많았다. 모처럼 먼 미국까지
왔으니 먹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표시로 대접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찾
아오는 손님에게 식사 접대는 으레 내가 할 일로 알고 정성껏 대접했
다. 그 당시에는 변변한식당도 없었고 우리의 주머니 사정이 이를 감
당할 수도 없었다. 돌아갈때는 당연히 남편이 운전사노릇을 해야 한
다. 피치 못할사정이 있으면 집에서 묵을 수도 있다. 방이 여유가 없
으니 하는 수없이 우리 부부가 쓰는 방을 내주기도 했다. 그리 깨끗지
않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신경을 써야 했다. 하루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기에 손님을 집에 모셔놓고도 출근해야 했다. 일을 하면
서도 마음이 안절부절 했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손님이 혹 오해나 하
지 않을까하는 염려까지 되었다.
    이렇게 손님을 치르면 자녀들 공부에 많은 지장을 가져왔다. 그래
서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가정에 아늑한 분위기가 없고 금방 들
어오신 손님에다가 떠나는 손님도 있어 아이들은 인사도 제대로 못하
겠다며 불편함을 말해 왔다. 이것이 페어팩스에 아이들 방을 따로 얻
어준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긴요하게 할 말
이 있어도 시간을 얻지 못했으며 우리는 자식에게 따뜻하게 사랑의 표
시도 하지 못했다.

    남편은 항상 자식들과 간단하게 공식적으로 대화힌고 대부분 내가
처리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많은 염려를 했다. 아직 성장기에 있는 자
식들이 혹 가정에 대해 반감을 갖거나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을까 하
여 가정예배 때 성경읽기와 암송에 힘을 기울였다. 그것은 참 잘한 일
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 주일에 벌어온 돈 중에서 가정에 필요한 것 외에는 교통비
만 넣고 다녔다. 한국에서는 내가 돈을 관리했는데 미국에서는 남편에
게 주었다. 운전하고 다닐 때 언제 무슨 일이 닥칠는지 모르므로 비상
금으로 지참하고 있는 것이 안전한 까닭이다.
    나는 오버타임을 좋아했다. 그래서 바쁜 일이 생기면 으레 나에게
시켰다. 일을 할 때는 미국 노동법에 의해 한 배의 반을 더 계산받게
된다. 오버타임할 때는 아침 6시부터 일했다. 어두컴컴할 때 나갔으나
나는 가족을 위한다는 목적이 있었기에 기쁨으로 일할 수 있었다. 저
녁에도 8시간의 노동 규정시간 외에 한두 시간 더 하는 때도 있지만
거뜬히 일하고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내 힘으로 우리 가정 경제
에 안정이 온다면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자부챘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1년에 4주간의 정기휴가를 준다. 그때도 나는
다른 공장을 나갔다. 수입을 더 올릴 수 있는 까닭이었다. 내가 조금
더 수고하면 수입을 더 올릴 수 있다는 보람이 있었다. 내일의 밝은날
을 위해서 힘껏 성공만을 기대하고 뛰었다. 오직 달러를 향해 뒤도 돌
아보지 않은 어리석은 소행이었다.


기술자가 된 나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한국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직장이 흔치
않아 곤란을 겪는 사람이 많았다. 이민자들은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
해 노동도 개의치 않았다. 여자들은 경험 없이도 노력하면 배워서 일
할 수 있는 다운타운 봉제공장으로 몰렸다. 때로는 교회에 와서 도움
을 청하는 사람도 많이 만났다. 나는 그때마다 친절히 대해주고 기술
을 배우도록 인도했다. 처음 직장에 나오는 사람이면 거의가 불안해
하는 걸 보았다. 나는 그들의 상담자가 되어 주고 믿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신앙의 뿌리를 심어 주었다. 그들이 주일마다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아 갈 때 나 또한 새 힘을 얻었다. 경험 없는 부인들을 위
해서 집에 파워미싱을 사다놓고 초보부터 가르쳐 나갔다. 한국에서는
파워미싱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그들에게 일일이 기술을 가르쳐 익히
게 한 다음 직장을 알선했다.
    요행이 통하지 않는 미국은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반드시 얻을 수
있는 나라이다. 정신무장을 한 한국 여성들은 화려했던 과거를 꼭꼭
묻어두고 '제2의 유대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앞만을보며 전진했다.
종아리가 붓도록 화장실 가는 것도 참으며 모질게 시련을 극복해 나가
는 그들은 참으로 대단한 존재였다.
    파워미싱은 꼭 배워야 했다. 파워미싱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일감을
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책임지고 말을 해서 돌보아주기도 하였다. 일
감은 언제나 피스웍으로 수량에 따라 수공비가 달라진다. 나는 나의
일하는 시간의 손해를 보면서도 가르쳐 주고 일단 나온 상품이 완성되
어서 통과될 때까지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1주일 후면 사람에 따라 어
느 정도 기술자가 된다. 평소 학교에 다니던 유학생들도 방학때는 일
감을 찾아 공장으로 나왔다. 저들은 다음 학기의 학비를 만들기 인해
서 기를 쓰고 일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주급이 올라갔다. 한 주일
만에 번 돈을 받아들었을 때의 그 표정, 노력과 애쓴 대가로 돈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 나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부인들의 손에 현
금이 쥐어져 빈손으로 온 식구들의 허기증을 면케 하니 말할수 없이
기뻐했다.
    그렇게 그들이 안정을 얻는것을 보면서 먼저 온 나의 할 일이 아닌
가 하는 보람을 느꼈다. 혹 나의 수입만 생각하고 불친절하다면 그들
은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서둘러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다운타운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한국 부인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졌다. 나중에는 한인들이 대부분이어서 봉제계를 점령할 만
큼 인정받게 되었다. 점차 공장을 운영하는 경영주도 나왔으니 큰 수
확이었다. 내가 부인들을 도운 것은 조금 더 일찍 와서 기술을 익혔다
는 것과 일하는 실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 뿐이다. 한국 여성들은 솜씨
도 탁월하고 극성스러워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강철이라도 뚫어낼 억
센 힘이 있다는 평을 받고 대환영을 받을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땀은 흘려도

남편의 공부가 끝나는 대로 귀국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떠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때 이천영 목사님이 미국에 있는 자녀들
방문차 LA에 오시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더 공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천영 목사님은 임동선 목사에게 공부하는 중간이라도 자기
자녀와 유리 방황하는 양떼들을 한 곳에 모아서 지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고 주위에 있는 친지들의 간청도 있어 임동선 목사는 기도에 들어
갔다.
    미국에서도 LA는 교량이 되는 지역으로 한국인에게는 미국의 관문
이 되어 한국 사람이 많이 모였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는 역할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
    신앙지도를 위해서 교회에서는 임동선 목사를 필요로 했다. 임동선
목사는 한국으로 돌아갈 때 가더라도 목회를 시작할 것을 결심하고
1970년 7월 14일에 교회창설 발족회를 가졌고 7월 마지막 주일인 7월
29일에 선교, 교육, 봉사를 목적으로 하고 동양선교교회라는 교회 명
칭을 달고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교회는 아이로로 스트리트 926번지에 있는 우리 집에서 시작되었
으며 첫날 모임에 장년 15명, 어린이 15명, 모두 30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동양선교교회의 시작이라 할수 있다. 우리 모임
에 같이한 성도들은 그 기쁨을 감출 수 없어 하나닝께 감사예물을 바
쳤다. 그날 헌금 액수가 400달러가 되었다. 첫날 모금된 금액 전체를
조국의 농어촌교회를 위해 헌납했다.
    임동선 목사는 이때만해도 다른 신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
고 있었으며 교회에서는 무보수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여
전히 인쇄소에 다니고 있었다.
    교회는 우리 집 리빙룸과 다이닝룸을 합쳐서 썼으나 웬만한 교회건
물 넓이와 같았다. 남편은 일본 교회 친구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의
하였다. 그렇게 해서 강대상과 의자 60개를 빌려가지고 왔다. 일본 교
회를 알게 된 것은 일본 교회에서 임동선 목사가 집회를 인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 반주는 큰딸 승혜가 맡았으며
작은딸은 이층에서 어린이들을 맡아서 성경도 가르치며 노래도 가르
치며 무용도 가르쳤다. 나는 아들과 같이 집안을 치웠다. 의자를 정돈
하며 커피를 끓이는 등 분주히 지냈으나 내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큰아들은 교인 가정 집집마다 찾아가서 초대를 했고, 주일이면 하루
종일 집을 개방했으며 저녁에는 다시 집안을 치우고 방안을 청소한 뒤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다. 우리 온 가족은 기쁨으로 개척에 참여했
으며 더욱 감사한 것은 이때를 위하여 그 집을 준비해 주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교회가 개척되니 제직이 필요했다. 아직은 집사를 둘
수가 없어서 임동선 목사는 몇몇 청년과 위원제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
고 주일 예배시에 연보대를 돌리지 않고 연보함을 놓기로 했다
    교회생활에 경험이 있는 몇몇 청년들이 토요일이 되면 주보를 만들
었다. 서로 돕는 가운데 교회는 면모를 갖추며 눈에 띄게 발전해갔다.
개척 3개월만에 교인 9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우리 집은
비교적 큰편이었지만 도저히 좁아서 예배를 드리기 어려워서 교회 장
소를 옮기게 되었다. 물색하던 중 산타바바라에 있는 북침례교회 2층
교육관으로 이전케 되었다. 3개월 반만인 11월 1일자로 그곳으로 갔던
것이다. 거리가 먼 것 같았으나 교인들은 빠짐없이 참석했고 불평하지
않았다.
    예배시간은 오후 1시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교육관이 넘쳐서 계
단에까지 서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2층이니 늘릴 여지도 없었다. 초
만원이 되었다. 이미 식구들은 계속 늘어나서 120명이나 되었다. 하나
님께서는 우리 동양선교교회를 축복해 주셨다. 많은 양떼를 보내주셔
서 날로날로 교회는 성장해 갔다.
    남편과 나와 자녀들은 언제나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
었다. LA 초원에 더 많은 양떼가 모여도 먹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께 큰 양무리를 보내달라고 매달렸다. 하나님께서는 나
와 남편과 교우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줄을 이어 양무리를 보내 주셨
다. 나는 피곤하였으나 하나님의 교회가 흥왕하는 모습을 볼 때 고난
도 이겨 나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일에 쫓기며 살기 때문에 몸에 항
상 피곤이 배어 있었다. 너무나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 피곤은 누
구만의 것도 아니요 나만의 것도 아니었다. 이민생활하는 모든 동포들의
표정이었다. 피곤하고 고단한 육체와 메마른 영혼의 양식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뛰어 다니며 제단에 엎드리는 임동선 목사는 실로 초
원의 목자 같았다.



     

교회 건물 구입

    크린샤워에 있는 남가주 치과협회가 있는건물이 우리 교회로서 적
합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200명 정도의 수용능력이 있
었으며 2층을 교육관으로 쓸 수 있고 주차장도 있어서 자동차 50대는
주차할 만했다. 특히 교회는 주차 장소가 절대 필요했다. 그 건물이 우
리 교회 실정에 꼭 맞았다. 나와 임동선 목사는 이 건물주가 팔 의사가
있었기에 미리 잡아 두었다. 시가는 13만5천 달라였다. 우리 교회 재
정 능력으로는 어려운 처지였다. 교회 재정은 불과 2천 달러 밖에 없
었구 때문이다.
    교회에서 당회를 열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장로님들에게 개인방문
하여 필요성을 역설하는 형편이었다. 교일들 중에는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새로 나온 이민가족과 유학생들이었기 때문
에 경제적으로 다같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집을 가진 사람은 우리 가정뿐이었다. 그래서 남편은 가족회의를
소집하고 교회 구입을 위해 이 집을 바치자고 제의했다. 나와 4남매 전
체가 동의했다. 이민 온 청교도처럼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집을
팔려고 부동산 중개업소에 내놓았다. 그러나 팔리지 않았다. 새 교회
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3만 5천달러의 다운페이가 있어야 했다. 집은
팔리지 않고 교우들에게 기대하기는 힘들고 하여 하나님 앞에 남편과
같이 매달렸다.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날마다 호소했다. 뜻밖에
과거 남편이 공군에 있을 때 사천비행장에서 공군 군종 하사관으로 데
리고 있던 손석호 씨가 제대하여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되었다는 소식
이 기억났다. 그곳으로 연락을 취했다. 국제전화로 연락을 했더니 며
칠 후에 1만 3천 달러가 도착하였다. 기도의 응답은 분명코 있었다. 그
리고 집을 은행에 저당잡혀 5천 달러를 대출받았다.
    이로써 3만 5천 달러 다운페이 중 우리가 1만 8천 달러를 헌금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 당회에서는 회의를 열고 토의를 했다. 임동선 목사
님 댁에서 t만 8천 달러를 냈으니 나머지는 당회 전체가 부담하자고
결론을 보게 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경제사정이 좋지 않은 중에서 성의껏 하나님의 성
전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임동선 목사는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사례를 받겠는가 하고 사례를 거절하였다. 큰 아들 승괌이는 미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선에 가 있었고 나는 봉제공장에서 계속 부지런히 일
을 했다.
    한편 교인들이 헌금하여 3만 달러 선까지는 마련되었으나 나머지 5
천 달러가 문제였다. 주인측에게 양해를 얻어 3만 달러만 지불하고 5
천 달러는 5개월에 걸쳐 1천 달러씩 매달 갚아 나아갔다.
    임 목사는 청소와 심부름,픽업 등 사찰의 일까지 보게 되었다. 항상
교회에서 밤낮없이 지내면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다. 시설도 개조하고
부속건물도 사게 되었다. 약 6개월 후에는 200명 성도가 300명으로
늘어나서 2부 예배로 나누어서 드리게 되었다. 2층에 있는 중 · 고등부
도 좁아지게 되었다.
    내 교회라는 애착심이 더 두터워졌고 교인들의 모임도 자유롭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음식을 얼마든지 먹어도 김치 냄새 난다는 말
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다. 그리고 어린이들도 마음대로 뛰어 놀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1972년 6월 4일 남가주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철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교회는 날로 부흥되고 있었다. 즐거운 비명
은 다시 시작되었다. 교회가 좁아져서 2부로 예배드리기에도 힘들게
되었다. 동양선교교회는 다시 큰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1974년 12
월 5일 웨스턴에 있는 랄프마켓을 구입하게 되었다. 구입액은62만 5
천 달러나 되었다. 우선 12만5천 달러의 다운페이가 필요했다. 50만
달러는 15년 동안 장기로 4천5백 달러씩 갚기로 했다. 1천7백 평에 세
워진 이 건물의 수용 능력은 1천 5백명이나 되었으며 자동차 130대의
주차 시설이 있었다.
    이 건물을 매입하는 데도 난관이 많았으나 처음 교회를 살때에 비
하면 애로가 적었다. 1975년 1월 26일에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여전히
우리의 생활은 교회에 의존할수 없었다.
    매월 페이멘트와 경상비가 적자였기에 젊은 집사 몇 분은 지금이라
도 팔고 우리 재력에 알맞는 건물을 다시 찾아보자고까지 했다. 그렇
지 않으면 돈을 갚지 못하여 파산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수록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렸고 간절한 애원의 기도를 드렸다. 어
려움이 크면 클수록 밤새워 기도할 때 여러 성도들도 함께 철야 기도
하며 서로 위로했다. 여전도회는 바자회와 후생사업으로 힘을 보탰고
온 교회가 시련을 이기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땀 흘리는 여성도들

    처음 교회를 시작했을 때에는 청년들이 많이 있어서 활기 있게 움직
여 나아갔다. 교회는 생동감이 넘치고 언제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나는 어딘지 모르게 잘 통하지 않는 점도 있음을 발견하고
원활한 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남녀간의 차이인지 연령의 차이인지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교회는 한 가
정과도 같은 유기체인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셔야 되겠으니 부드럽
고 자비심 많으며 이해심이 많은 할머니를 많이 보내 주십시오. 교회
는 기도가 중심인데 권사님들의 기도 소리가 크면 클수록 온 교인을
포섭하는 사랑의 힘도 커지겠으니 기도의 어머니들을 많이 보내 주십
시오.' 이것이 나의 기도 제목이었다.
    나는 할머니라고 불리기에는 아직 일렀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뻘
되는 여성도들을 좋아했다. 어딘지 모르게 세상의 기쁨과 쓰라림을 다
겪은 성숙한 신앙과 인간성 때문인지 모르지만 흐뭇하고 정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기도의 어머니'를 기도의 제목으로 잡고 간구하게 되었
다. 한 분, 두 분 교회로 어머니들이 모일 때 나는 무한히 기뻤다. 교회
의 문제를 안고 기진해 있을 때 할머니들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얼마
나 큰 활력소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 권사님 한 분을 붙잡고 나의 기도 제목을 말하고 함께 기도하자
고 하니 그 권사님은 기뻐하였다. 교회가 필요로 할 때 뒤에서 힘이 되
고 믿음으로 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해 줄 때 실망할 여지가 없었다.
    어떤 권사님은 미국에 도착한 이튿날부터 한 주일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며 교회 안에 무슨 어려운 일이 없는가 살피면서
수십 년 동안 충성스럽게 봉사하고 있다.
    교회가 빚으로 헤매고 있을 때에 여전도회는 매주일 주말만 되면
교회에 모여 200마일이 넘는 베이커스필드에 자동차를 몰고 가서 유
복형 씨가 무료로 제공하는 배추, 무를 얻어 가지고 왔다. 그때 유농장
에서 교회에 모두 무료로 제공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밭에 가서 뽑아
교회까지 운반을 해야 했다. 일행들은 금요일 저녁에 그곳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토요일 새벽에 밭으로 나가서 배추와 무를 뽑았다. 그
곳에 따라간 어린 학생들도 함께 밭에서 일하던 모습이 눈에 지금도
선하게 보인다.
    현지에서 싣고 온 야채를 가지고 교회에 대기하고 있던 몇몇의 교
인들이 김치를 담갔다. 또 일부에서는 김치를 해서 담을 빈 병을수집
했다. 한번 김치를 담게 되면 100여 병씩 담게 된다. 여전도회원들은
밤늦게까지 마늘을 까고 고추를 찧고 수고하면서도 불평을 하는 분은
한 분도 없었다. 나는 무와 배추가 필요한 집으로 배달을 해주었다. 이
작업을 통해 푼푼이 들어 오는 돈도 적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마냥 기
뻐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한국전쟁의 쓰라린 경험이 오히려 오늘에
와서는 우리에게 역경도 뚫고 나아갈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며 그 기초가 미국에서 신앙을 쌓는 토대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매일 같이 교회는 북적거렸다. 강대상 앞에 침구를 갖다가 놓은
할머니들이 많이 있었으며 밤늦게까지 기도를드리셨다. 넓고 좋은 안방
보다 편하다는 말을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사실 나도 교회에서 자는
날이 집에서 자는 날보다 많았다. 이렇게 교회 안에는 10~15명 정도의
성도가 합심하여 늘 기도 드릴 때 하나님께서도 합심기도를 들으시고
목표 있는 기도 제목의 응답을 이루어 주셨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같
이 기쁜 일이었다.
    지금도 기도의 불길이 솟고 있으며 매월 마지막주 금요일에는 100
억 명의 성도가 귀한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며 각기 소원을 아뢰고 있
다. 목회하는 목사는 그럴 때 더욱 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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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임동선 원로목사의 아내수기 관리 2010.06.11 90594
1 수기! 배부전 기자의 30년 LA 활동 스토리 관리 2007.03.15 169301
저희 미주 통일 신문에 관심과 격려를 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2001년과 2002년 기사는 복구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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